권두언 252

에세이비평, 교감(交感)과 공감(共感)의 시 비평/ 전해수

에세이비평, 교감交感과 공감共感의 시 비평 전해수/ 문학평론가 『공정한 시인의 사회』 신작시를 중심으로 월평月評을 게재하게 되었다. 이 글의 타이틀을 '월평'이라 하지 않고 '에세이비평'이라 한 이유는 전월 호에 발표된 신작시를 비평하는 나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인 비평을 표방한다. '에세이비평'이라 하였으니, 비평으로서는 좀더 희미하고 좀 더 낮아질 수밖에 없겠으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시와의 교감과 시적 공감의 일련들을 '에세이' 방식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다만, 한 줄 변명처럼 '에세이비평'이라 하여 나약한 비판정신을 지닌 것이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실상 '에세이비평'의 명명은 2019년 '나의 비평의 순간'을 고백하는 자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

권두언 2021.08.11

시는 생명에 전체성을 개화시키는 것(발췌)/ 함동선

中 시는 생명에 전체성을 개화시키는 것 함동선 나는 6.25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된 다음 해(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서정주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시 실기' 강의실에서였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그래서 천진스러운 인상과 그 느리고 굵은 목소리의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한 편의 시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 10대 후반부터 보들레르의 시집 『파리의 우울』을 읽고 "악이 소용돌이치는 삶에서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의 친구가 된 보들레르에게 심취했다."는 모습이 근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진의 양화陽畵와 음화陰畫처럼 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p. 10)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 기억에 남는 첫째는, 옥스퍼드 사전에 "서정시抒情詩(lyric)는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비교적 짧은 형..

권두언 2021.07.14

부고_김명서 시인 타계(1949~2021, 72세)

카르마의 법칙 김명서 그래서 하루는 전 생애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바람을 보내고 면벽한다 기억의 한 뿌리는 전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법구경 몇 줄 암송한다 끝줄 미망에 걸린다 미망에 짓눌려 그래로 잠에 잠겨버린다 잠이 깊어지니 비몽非夢과 비몽悲夢의 분할선에 예언의 힘이 빙의된다 오리온자리를 에둘러 흐르는 강 건너 미궁에 갇혀 연자매를 힘겹게 끄는 천형, 불생불멸의 고리를 끊겠다고 죄를 면제받는 소도蘇塗를 향해 천 마리 종이학 날린다 깃털들 하늘하늘 날고 한가득 울리는 북소리 장대에 앉은 나비도 몽환으로 빠져든다 몽환 아래쪽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업들이 한 줄로 서 있다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서서 막막히 울리는 방울소리 북소리와 뒤섞이고 신내림처럼 고달픈 이야깃거리들이 울긋불긋 깃발을 흔든다 -전문- 김명서 시..

권두언 2021.07.09

첨단미래사회와 문학의 영역/ 김후란

첨단미래사회와 문학의 영역 김후란/ 시인 · 한국문인협회 고문 중앙아시아 고려인들 방문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밤길, 광활한 언덕길에 차를 세우고 잠시 풀밭에 내려 휴식을 취하던 때였다. 맑은 공기에 가슴을 펴면서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일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저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꽉 차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아, 일행은 누구랄 것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한동안 눈부신 별들의 세계에 압도되어 있었다. 생전 처음 가까이 보이는 별들의 실체에 황홀해지면서 손을 뻗어 그 큰 별을 한두 개 따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보아 오던 밤하늘 별들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돛대도 아니 달고~'로 동심을 자극하던 꿈과 함께 아득한 허공에 반짝이는 머나먼 세계였다. 그나마도 ..

권두언 2021.06.22

단장취의(斷章取義)의 각색/ 강기옥

단장취의斷章取義의 각색 강기옥/ 본지 편집주간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단장취의斷章取義는 남의 시문詩文 중에서 어느 한 구절만 인용하여 마음대로 자기의 뜻에 맞게 해석하는 일종의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억지 이론을 끌어들여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견강부회는 단장취의 가장 적절한 방법일 수 있다. 요즘의 단장취의는 언론이 앞서 보도하고 있어 식상하게 한다.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수긍하는 말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자기가 최고라는 자화자찬의 낯내기 일색이다. 이들의 단장취의는 말꼬리 잡기와 같은 싸움으로 품격이 없다. 언어를 통해 그 순간의 효과만 발휘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정치판의 언어는 작은 실수라도 사활을 건 승부수로 작용한다. 그래서 후당後唐시대의 풍도馮道는 상사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처세로 오조..

권두언 2021.06.16

부고_박일 시인 타계(1969~2021, 52세)

한 목숨이었다는 생각 박일(1969~2021, 52세) 말아진 멍석에 남겨진 나락 한 톨처럼 외딴 방에 처박혀 밀린 대본을 외우듯 숨을 들이키네 희미한 거울 앞에 웃음도 묻혀가네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먼지라도 되어 방을 빠져나오고 싶네 그러한 이때 목련은 지침을 내리며 다녀가네 하루를 살아도 꽃처럼 꽃처럼, 지난해 된똥 한번 싸지르고 단방에 숨죽었던 애기똥풀 어렵사리 다시 온 그도 조심히 이르네 백년을 살아도 부디 꽃처럼, 온 산 뒤덮는 진달래 꽃은 헛되이 지지않네 영취산 녹음의 절반이 말없이 다녀간 진달래의 겸허한 발자취였다는 사실 며칠 전 분양해온 강아지 날 보고 웃네 는적는적한 땅거미 지기 전 발맞춤을 서두르자하네 생生이란 것이 길든 짧든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배려하며 갈 때는 그저 말없이 꽃처럼 ..

권두언 2021.06.11

논리적 사유, 신화적 사유/ 임승빈

논리적 사유, 신화적 사유 임승빈/ 본지 주간 환자는 궁금한 게 많다. 혹시 큰 병이 아닐까 겁도 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고 싶은데, 막상 의사는 그런 여유(?)를 허락지 않는다. 치료와 약에 대한 일방적 처방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대학병원의 경우, 의사 한 사람이 봐야 할 환자가 120여 명이 넘고, 의사 입장에선 언제나 너무 뻔한 질문의 반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료장비가 최첨단이라서 굳이 문진이나 촉진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로서의 C. G. 융은 달랐다. 그의 회고록 『기억 · 꿈 · 사랑』에 의하면, 문진이나 상담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정신과의 특징 때문이..

권두언 2021.05.17

성난 돼지감자/ 원구식

성난 돼지감자 원구식 나는 걸신들린 여우처럼 산비탈에서 야생의 돼지감자를 캐 먹는다. 먹으면 혀가 아리고, 열이 나고, 몸이 가려운 돼지감자. 독을 품은 돼지감자.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든, 야생의 돼지감자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삶의 줄기에 독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세상을 향해 외친다. 나 돼지감자야. 어디 한번 씹어 봐. 먹어, 먹으라니까. 그러나 나는 가짜 돼지감자. 독도 없으면서 있는 체 하는 가짜 돼지감자. 우리는 모두 가짜 돼지감자. 길들은, 교육받은, 그리하여 녹말이 다 빠진, 착한, 힘이 없는, 꽉꽉 씹히는, 그러나 성난, -전문- 2021년 4월호 VOL. 32-4 현대시 어드벤티지 ■ 추천심의위원 김혜순 남진우 송재학 장석주 정과리 최승호 ----------------------..

권두언 2021.05.10

문인으로 산다는 것(발췌)/ 나태주

中 문인으로 산다는 것(발췌) 나태주/ 시인, 한국시인협회 회장 돈과 물질, 권력,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좀 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면 가장 상층부에 있는 명예다. 명예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고 시를 쓰는 것이다. 명예는 그 아래 단계를 포괄하면서도 초월한다. 심지어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까지도 살아남아 작용을 한다. 이것도 언젠가 『월간문학』의 조지훈 선생 특집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생전부귀生前富貴 사후문장死後文章' 맞는 말씀이시다. 부귀. 돈이나 물질이 많은 것과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이 되는 것. 이른바 부유와 출세. 모든 사람이 꿈꾸고 바라는 바다. 더러는 그것 때문에 놀라곤 한다. 왜 내가 시인이지 작가인가?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소설가를 따로이 부르는 이름이 작가였던 것이다. 이..

권두언 2021.04.15

최정례 시인 타계(1955~2021, 66세)

약국을 지나다 최정례(1955~2021, 66세) 왜 여기를 지나는지 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몇년 몇월 몇일 몇 시 몇 분이었는지 한 웅큼 알약을 털어 넣고 먼 싸이렌 소리를 듣던 게 예리한 칼 같은 것이 살을 베이면 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난다 약병 속에는 이상한 이름의 성분들 그들이 지녔던 깨알 같던 희망도 죽어 정리되어 있으리라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병들은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질 시간이다 -전문- ♣ 최정례 시인이 2021년 1월 16일 별세했다. 고인은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

권두언 202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