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봉준_나의 아름다운 장소들(발췌)/ 산책 : 강지이

검지 정숙자 2022. 4. 10. 01:32

 

    산책

 

    강지이

 

 

  어제는 산책을 나갔다 걷고 물을 마시고 또 걷다가 커다란 물푸레나무 아래서 책을 파는 사람을 만났다 고양이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테이블 위엔 두 권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당나귀 그림이 그려진 흰 책과 짙은 녹색 책이었다 나는 당나귀 그림이 그려진 흰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한번 펼쳐 보세요 고양이가 말하고 표지를 넘기자 책 속엔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한참을 걸었다 바다로 가까이 다가가니 희고 둥근 종이들이 물 위에 떠 있고 종이에 무언가 적혀 있는 것 같아 잡으려 손을 대니 나는 어느새 바닷속에 있고 떠 있던 둥근 종이들은 물 안의 그림자가 되어 까만 해처럼 보이고 내 얼굴 위로는 그림자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무수히 많은 검은 해를 맞으며 또다시 걸었다 숨을 쉴 때마다 물이 들어왔다

   -전문-

 

  나의 아름다운 장소들_'공간'을 통해 본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발췌) _고봉준/ 문학평론가

  인용시는 '산책'으로 시작된다. 강지이의 시에서 화자가 '산책' 중에 경험하는 세계는 다분히 몽환적이어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 지점처럼 표현된다. 이는 '산책'이라는 행위가 일상의 중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산책」의 화자는 길 위에서 "고양이 가면"을 쓰고 책을 파는 사람을 조우한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세계, 단일한 시적 공간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음 순간 화자가 책의 표지를 넘기자 '바다'가 등장한다. "책 속엔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한참을 걸었다"라는 진술처럼 이때의 '바다'는 그림, 즉 표상이 아니라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진 지점에서 등장하는 낯선 세계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러한 낯선 세계의 출현이 이미-항상 '산책'과 연결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언젠가 리베카 솔닛은 걷는 행위에 대해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인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 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의 말처럼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이 곧장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라면 '공간' 속을 지나가는 일 또한 '장소'를 지나가는 행위의 메아리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용적인 목적의 이동이 아니라 두 발로 걷는 산책 행위에서 우리는 건조한 일상의 풍경이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있는 낯선 풍경의 '장소'와 조우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개인의 실존과 연결됨으로써 삶의 자극제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 시 33-34/ 론 3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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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2022-봄(24)호 <issue_공간> 에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 『유령등』『비인청적인 것』『문학 이후의 문학』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