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미라_미각과 통증 사이의 변증법(발췌)/ 아버지의 금고 : 백미숙

검지 정숙자 2022. 4. 5. 02:55

 

    아버지의 금고

 

    백미숙

 

 

  재산가인 아버지가 의식 없이

  목숨이 경각인 병상에 누워있다

  자식들이 그 옆에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다

 

  비밀번호를 알 수 없으면 어쩌나

  발굴되지 않은 고요의 무덤처럼

  몇 세기 후에야 열리게 될 고분처럼

  마음이 분주하다

 

  아버지보다 먼저 금고에 숨이 막혀

  유언장이 폭발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초 단위로 시간이 흐른다

 

  궤도이탈의 꿈을 꾸던

  자식들이 우당탕탕 몰려나가자

  아버지의 꾹 감긴 눈에 물기가 돌아

  마른 실개천을 적신다

 

  아버지는 방금

  전지적 시점으로 사후를 겪고 만다

     -전문-

 

  ▶ 미각味覺과 통각痛覺사이의 변증법(발췌) _ 김미라(문학평론가)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낯익"은 장면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보다 '유언장의 죽음'에 민감한 자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적인 존재인 아버지는 "전지적 시점으로" 자식들의 내면을 관통하며 죽음 이후의 전말을 꿰고 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한 편의 드라마는 "아버지의 꼭 감긴 눈에"서 흐르는 "물기"가 "마른 실개천을 적"심으로써 비극적 서사의 체험으로부터 해방을 꿈꾼다.

 

  벤야민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그의 생애 전체가 작은 이미지들로 눈앞을 휙 스쳐 지나간다는 말을 종종 인용한다. 그는 프루스트의 '비자의적 기억'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우리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라고 해석한다. 망각된 것, 일상적인 것, 진부한 것, 망가지고 초라한 것으로부터 현재의 이미지를 읽어 내고자 한 그의 구제 비평적 읽기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처한 상황처럼, 위기의 순간 '쓰이지 않는 것을 읽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가 열리는 공간이 '신체 공간'과 상호 침투하고, 무엇보다 '신경 감응'이 이 두 공간을 매개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신체는 죽음만을 기다린 채 고립되어 있다. "궤도이탈의 꿈을 꾸던"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남겨두고 나가버린 "자식들"에서 걸린다. 예술이 닿으려는 흑점이 바로 "발굴되지 않은 고요의 무덤"이자 "몇 세기 후에야 열리게 될 고분"임을 암시한다. 유언장이 담긴 금고의 비밀번호를 찾는 자식들의 욕망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처럼 초조하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감추는 것, 즉 또 하나의 어둠을 쳐다보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또 하나의 어둠'은 쉽게 드러나지 않거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는 '예술이 다다를 수 없는 극단'이자 시가 품고 있는 비밀이다. 영원히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인 역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 오직 노래 속에서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오르페우스의 시선과 닮아 있다. ( p. 시 128/ 론 136-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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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MUNPA』2022-봄(63)호 <소시집/ 신작시/ 작품론> 에서

  * 백미숙/ 2005년『한국문인』으로 시 부문 & 2010년 수필 부문 등단, 시집 『나비의 그림자』『리모델링하고 싶은 여자』외

  * 김미라/ 2021년『예술가』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논문「기형도 시에 나타난 환상성」「기형도 시의 역사의식 연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