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언어> 中
2021 이 가을에 빈다(부분)
이상문/ 소설가
종이 이전에 서사재로 쓰던 파피루스가 있었다. 이집트 라인강변에서만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갈대로 만들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이었다. 이 나라의 왕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무려 70만 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학문과 역사 자료였다.
그런데 오스만투르크 제국 중 하나인 페라가몬의 왕이 거기에 버금가는 도서관을 만들자는 꿈을 갖고 있었다. 문화 선진국으로 우뚝 서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집트와 교섭 끝에 귀한 갈대 수입에 성공했고, 몇 년 동안의 쉬지 않는 노력으로 두루마리 20만 개를 소장하게 됐다. 이때 문제가 생겼다. 소식을 들은 이집트 왕이 곧 갈대를 수출금지 품목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파피루스 갈대는 이집트에서만 생산되는 것이어서, 페라가몬의 왕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문화선진국의 꿈을 그만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끝내 꿈을 포기하지 않은 페라가몬의 왕이 찾아낸 발명품은 바로 '양피지'였다. 그래서 영어의 양피지(parchment)는 라틴어 페라가몬(pergamena)에서 온 것이다. 어린 양의 껍질을 무두질한 것이 최고품이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에 비해 단점이 많았다. 속에 있는 내용을 보려면 끝까지 펼쳐야 한다는 점은 서로 같았으나, 양피지는 부피가 크고 두껍고 무거웠다.
이번에는 단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됐다. 결국 찾아낸 방법이 두루마리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한데 모아, 그것의 한 쪽을 꿰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현대에서 '책'이라 하는 제본책 형태의 시작이었다. 읽을 때도 소지하는 데도 보관할 때도 파피루스보다 훨씬 편리하고 유리했다. 그렇다고 제본책의 기술이 금세 세상에 퍼진 것은 아니었다. 위정자가 제 사정을 앞세우는 통에, 13세기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후진국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여럿이었다. 이런 사실을 우리의 현실과 같이 두고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이 가을에 참담하다는 말밖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앞을 향해 계속 노를 젓는다. 물살에 떠밀려 끊임없이 과거로 후퇴하는 운명 속에서도."
미국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끝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 속의 개츠비는 옛 애인을 되찾기 위해 돈을 벌어 상류층에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목적을 이루는 데는 실패한다. 그런데 작가 피츠 제럴드는 왜 그토록 강한 의지를 독자들에게 당부했을까. 꿈은 이루는 경우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기가 없다면 성공할 때가 기어이 오기 때문이다. (p.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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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 2021-겨울(57)호 <이 계절의 언어> 에서
* 이상문(1947~)/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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