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이병주 소설가 탄생 100주년 기념/ 대표작> 中
성벽城壁과 성문의 의미
이병주(1920-1992, 72세)
북한산의 성벽을 끼고 돌면서 나는 가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회상한다. 팔자의 기구한 장난으로 20대의 청년 시절 나는 만리장성을 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의 말기, 어느 해의 2월 초순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북행 열차를 탔다. 밤사이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섰다. 약 3주야를 지나 봉천, 즉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아침이었다. 그곳에서 열차는 방향을 서쪽으로 잡았다. 금주錦州 열하熱河를 지났다. 이틀 낮과 밤을 지났을 무렵에 돌연 차창 너머로 다가서는 이상한 풍경이 있었다. 그것이 만리장성이었다.
나는 순간 호흡을 멈추고 만리장성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손가락으로 지도 위에서 짚어보고 더듬어 보던 그 신화 속의 만리장성이 현실이 되어 육안 앞에 나타났을 때의 충격적인 감회는 지금도 내 추억 속에 선명하다.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서쪽 가욕관嘉峪關에까지 장장 2,400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다. 서기 전 3세기에 진시황秦始皇이 축성한 것을 한대漢代에 이르러 확장한 것인데, 장성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6세기 때의 일이고, 오늘 보는 바와 같은 견고한 규모는 명대明代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고증考證은 그만두고라도, 2,400킬로미터에 걸친 웅장한 규모는 정말 놀라운 경관景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북한산의 성벽에 기대서서 만리장성을 회상하는 것은 야릇한 기분으로 되지만, 그 야릇한 기분의 바탕엔 조국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이 있다. 애착이 있다.
옛날 중국인들은 조선이 소국小國임을 멸시하는 표현으로서 江不千里강불천리 野不百里야불백리의 나라라고 했다. 천 리가 되는 강이 없고, 백 리가 되는 들이 없는 작은 나라라는 뜻이다.
그 '강불천리'한 나라에서 온 청년이 만리장성 위에 서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진 말과 문자로선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빛깔로서만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한 가지 기억에 남아 있는 사실은 만리장성을 보고서야 우리 선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이해할 수 있었고, 무슨 기록에 우리의 연호를 쓰지 않고 망해 버린 명나라에 절개를 세워 '숭정후崇禎後' 몇 년이라고 쓰는 선비들의 관성慣性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슬픈 추억은 북한산의 성벽을 이룬 돌 한 개 한 개에 대한 애착으로서 내 가슴에 메아리를 남긴다.
그러나 만리장성이고 북한산의 성이고 간에 인사人事의 허망虛妄을 가르치는 점에 있어선 매양 마찬가지이다.
허망도 또한 배워둘 만한 지혜이다. 참다운 진취進取는 허망을 밑바닥에 깔고서만 비로소 인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휴머니즘은 '허망'을 잊지 않고 그시 그시 '허망'을 극복하면서 사는 가운데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허망을 배우기 위해 북한산으로 가라! (p. 26-28)
* 출전: 『산山을 생각한다』(서당, 1988)
----------------
*『한국문학인』 2021-여름(55)호 <특별기획 | 이병주 소설가 탄생 100주년 기념 | 대표작> 에서
* 이병주(1920-1992, 72세)/ 경남 하동 출생, 데뷔작 중편소설『알렉산드리아』, 역사소설『관부연락선』, 장편소설『지리산』등
'한 줄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연극의 거장, 베르돌트 브레히트/ 편집부 (0) | 2022.04.07 |
---|---|
관점_돌고 있는 것은 우리다!(발췌)/ 카를로 로벨리 : 이중원 옮김 (0) | 2022.03.28 |
바람칼과 칼깃/ 故 장승욱 (0) | 2022.03.21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T.S.엘리엇/ 편집부 (0) | 2022.03.19 |
조선의 모파상, 소설가 이태준/ 편집부 (0) | 2022.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