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삼위海蔘威*
홍성식
소년 이태준이 아비 찾아갔다는 변경邊境행 배는 흥청거렸다. 이탈리아 웨이트리스들이 한국 사내가 마실 포도주를 바쁘게 날랐다. 새벽 무렵엔 갑판에 토사물이 흥건했고, 중국 인부는 코를 싸쥐며 찌푸렸다. 창문 없는 크루즈 삼등객실에선 신음 소리가 요한했다.
해는 중천인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온도계가 영하 25도를 가리켰다. 하선下船한 이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독한 보드카를 찾았고, 금발을 날리며 행진하는 건 러시아 군대가 아닌 혼혈의 시베리아 여자들. 누군가 눈이 부셔 어지럽다고 호소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 요새와 스탈린 시대 청동 조각상이 곁눈질하는 늙고 낡은 도시. 아침부터 밀려온 안개는 물러날 기미가 없고, 동그란 눈의 아이 하나가 무거운 나무 문짝을 아까부터 밀고 있다. 젊은 엄마 손잡고 해삼위에 간 어린 이태준은 아직 블라디보스토크에 산다.
-전문-
* 해삼위海蔘威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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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문학에스프리』 2020-겨울(35)호 <신작 시>에서
* 홍성식/ 2005년 『시경』으로 등단, 시집 『아버지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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