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진외갓집/ 한영숙

검지 정숙자 2021. 1. 19. 23:08

 

    진외갓집

 

    한영숙

 

 

  아재가 신부 집에서 초래를 치르던 날

  어린 나는 옷 보퉁이 이고 친정 가는 할매 따라나선다

  울퉁불퉁 시골길 험준한 금산재 넘느라

  버스는 헉헉거렸고

  산모롱이 돌아 에움길 걸어서

  동네 어귀에 이르면

  정다운 얼굴들이 고모님, 고모할머니 하며

  얼싸안고 할매 모시고 들어간다

  마당에는 솥뚜껑에 전 부치는 아낙들

  가마솥에 돼지 삶는 남정네들

  단술과 메밀묵 사발을 게 눈 감추듯 하던 노인들

  시끌벅적 동네잔치에 종부는 하루 종일 종종거렸다

  신랑 신부 산행을 다녀와서도 계속되는 잔치

  종부는 싫은 내색이 없었다

  온 마을이 친척 같은 사람들

  산과 들에 새하얗게 눈이 내리면

  격자 문양 한지 문에 달빛 받은 마른 들국화가 환히 비쳤고

  방 한구석 콩나물시루가 아침마다 물을 먹고 자라던

  아늑하고 따뜻했던 방

  아! 지금은 지상에 없는 집

  마당 가득했던 사람들 웃음도 끊긴 지 오래

  관절염 앓는 종부가 절뚝거리며 홀로

  콘크리트 양옥집을 지키고 있는

  개진면 반운리 진외갓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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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작』 2020-겨울호 <신작시> 에서

  * 한영숙/ 2017년 『서정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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