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계단은 살아있다/ 허승호

검지 정숙자 2021. 1. 16. 02:59

 

    계단은 살아 있다

 

    허승호

 

 

  어린 시절 산림녹화에서부터 도로를 닦는

  울력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하루는 산정에 나무계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돌계단으로 길을 만들기 어려운 곳이나

  경사가 심해 길을 만들기 불가능한 곳에

  나무계단으로 길을 만들었다

 

  죽어 있는 나무는 계단이 될 수 없었고

  너무 큰 나무도 너무 작은 나무도 사용할 수 없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푸른 꿈을 키우고

  손발을 다 내줄 수 있을 때

  비탈에 엎드려 계단이 될 수 있었다

  바닥에서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

 

  나무는 살아서는 오를 수 없는 길에서

  죽어서야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을 밀어주고

  거친 숨을 잡아 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계단의 힘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정상 앞에서

  뒤돌아서거나, 산정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아

  저 너머의 세상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해지기 위해 생을 살아야 한다는

  나무계단 앞에서

  휘청거리는 생각을 붙잡고

  산정을 행해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혀야겠다

 

  죽어서도 죽지 않고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나무계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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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와사람』 2020-겨울(98)호 <신작시> 에서

   * 허승호/ 2013년 『사람의 깊이』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 『디톡스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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