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직 죽은 사람/ 김중일

검지 정숙자 2021. 1. 12. 02:28

 

    아직 죽은 사람

 

    김중일

 

 

  나는 방금 전까지 내 기억 속에서 살다 왔다고 주장하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다.

  더 들어볼 일고의 이유가 없는, 뻔하고 가소로운 수작을 부리는 그 낯선 사람은 심지어 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나의 기억은 통째로 미래에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 언젠가는 미래도 누군가의 기억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당신이 완벽히 낯설어요.

 

  그는 그 순간 눈을 반짝이며 내 말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잠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순발력이었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이 방금 말한 그 '완벽히' 속에서 내가 살다 왔습니다.

  당신이 완벽히 기억하고 있다고, 또는 완벽히 기억에 없다고

  완벽히 믿고 있는 그 깊은 두 단층 속의 진앙.

  미래와 과거 또는 기억과 망각의 두 단층이 엇갈리며 낸 지진, 시간의 틈새에서.

  그 순간

  하늘에서 망치로 창문들을 내려치는 듯한 소리가 났고 으스러진 유리 조각 같은 빗방울들이

  폭발한 우주선 잔해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미 죽은 먼 미래의 어느 밤에, 생전 당신이 평생 못 잊은 기억을 기록한 시를 우연히 읽고 그만,

  그 시 속에 갇힌 사람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매료되었다기보다는, 덫에 걸린 것에 가깝죠.

  당신이 죽으며 버리고 간 부비트랩 같은, 당신이 끝내 못 잊은 기억의 일부에 엮여,

  본의 아니게 이렇게 저는 당신이 죽어서도 못 잊는 기억에 속한 사람입니다.

 

  며칠 전 당신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시를 쓰고 있을 때

  저는 당신보다 얼마간 먼저 죽은 사람이거나

  지금 이렇게,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죽은 사람입니다.

 

  백색소음처럼, 미래와 현재의 시제가 자주 뒤섞이는 그 사람의 얘기를 흘려듣다가 나는 궁금해진다.

  당신이 온 미래는,

  죽은 나도 못 잊을만한 일들이 여전히 많습니까, 묻는 순간

  나는 어느새 내가 죽은 미래의 깊은 밤, 어느 방에 와 있다.

  색바랜 내 시집의 페이지들을 블라인드처럼 걷어 젖히고,

  내 기억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처음 보는 그 사람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역시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떤 기억을 유독 못 잊는 이유를 나조차 도통 '알 수 없는' 것처럼,

  결코 못 잊을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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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마詩魔』 제6호. 2020. 12. <시마詩魔-겨울 신작시> 에서

    * 김중일金重一/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가슴에서 사슴까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