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함기석
난 누굽니까
넌 돌멩이다 진흙이고 지렁이고 불탄 숯이다
그럼 난 누굽니까
넌 바위다 진흙소고 낙타고 구름이다
그럼 난 물입니까
그래 불이다 훨훨 맹렬히 타는 얼음이다
그럼 난 불입니까
그래 빙하다 활활 맹렬히 얼어붙은 숲이다
그럼 난 물이고 불인 달입니까
그래 달그림자다
꽃그늘 속 꽃그늘이니, 피는 색이다
그럼 난 원이고 색입니까
원 안의 원이고 원 밖의 원이다
흰 웃음이고 검은 울음이니
맘껏 피어라
-전문-
▶ 백색소음 속 언어의 낙처를 찾아서-함기석의 시(발췌)_전기철/ 시인
선禪에서는 사구四句나 백비(白非;침묵)조차 거부한다. 하지만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사구와 백비가 쓰인다. 따라서 방편으로서 화두, 곧 대화는 문자반야文字般若라 하여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대화법은 너와 나, 하늘과 땅, 위와 아래 등 모든 다중적 소음을 극복하고 평등심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대화 속에는 어떤 물음도 답도 극복된다. 함기석은 「장미」에서 이 대화법을 차용해 자신의 기호적 언어, 소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 백색소음이 나타난다. 백색소음 속에서 주체의 내면은 한없이 고요해지고 맑아진다. 즉 이러한 대화법을 통해서 시인은 끝없이 이어지는 말의 낙처를 찾아 내면의 사이를 무화한다. 그 넓은 사이, 궁극적으로 관계의 무화에서 시인은 언어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난 누굽니까"라는 물음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주체의 내면으로 파고들지만 아무리 대답을 해도 답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물음과 답은 모두 주체와 객체 모두에 속한다. 주체와 객체의 변별은 무화된다. 따라서 "맘껏 피어라"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무의 개방성이다. (p. 시 204/ 론 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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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ITION 포지션』 2020-겨울호 <POSITION 5 집중조명/ 신작시/ 작품론> 에서
* 함기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디자인하우수 센텐스』 등
* 전기철/ 198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풍경의 위독』 『누이의 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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