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익균_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발췌)/ 히아신스로 인해 : 임승유

검지 정숙자 2020. 6. 15. 01:17

 

 

    히아신스로 인해

    임승유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달라지기 전에는 너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잘 자'였고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는 '잘 지내'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로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나 히아신스 사갖고 와서 홍콩야자 뽑아낸 화분에 심는다는 이야기로 뭘 하려고 그러나

 

  낮에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홍콩야자는 온데간데없어지고 히아신스가 흰 꽃을 피웠더라는

 

  봄날 오후

 

  온데간데없어졌다는 홍콩야자는 빈틈을 만들었다. 가다가 옆으로 빠져도 모를 것이다. 잘 지내 그러면 잘 지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태양이 이동했다.

 

  창문을 바닥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빛에 규모가 생겼다. 옮긴 곳에서 잘 지내려면 적응 기간이 필요하고

 

  히아신스는 엄청난 향기를 풍겼는데 만개한 이후에 시들해졌다. 잘 자 그런 말 없이도 낮에는 잘 잤다.

      -전문-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다(발췌) _ 김익균/ 문학평론가

  위의 시는 "상투적인 말투"를 대체하는 아이러니(irony)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아이러니, 즉 반어는 전통적으로 '이것을 말하면서 저것을 의미하는 것', '칭찬을 통한 비난 또는 비난을 통한 칭찬'을 의미하였다. 아이러니의 어원은 그리스어 'eironeia'('시치미떼기 수법')인데 이는 고대 그리스 희극의 인물인 에이론(eiron)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 희극에서는 겸손한 약자로서 총명한 주인공 에이론과 허세를 부리는 강자로서 어리석기 그지없는 알라존(alszon)이 등장하여 논쟁을 한다. 겉보기에 어리석고 무능하게 보이는 에이론이 똑똑한 척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알라존을 꺾어 관객을 즐겁게 하는 구조로 이는 디즈니 만화의 톰과 제리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무지하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총명한 에이론의 이중적 성격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김준오, 『시론』, 삼지원, 307~308쪽). 폴 드 만은 이런 반어의 특질을 철학자가 일상적 자아의 활동과 반성적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에 비견되는 '이중화(duplication)'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는 표면적 화자로서의 일상적 자아와 이면적 화자로서의 반성적 자아가 반어 안에서 공존함을 가리킨다. 이처럼 반어의 자아는 통일적이고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이중적 자아 혹은 다중적 자아인 것이다.

  「히아신스로 인해」를 읽을 때 우선 우리는 제목과 시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흔히 제목은 시 전체를 규정한다고 믿어지지만 너무나 가벼운 말투가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해체한다. 이 시를 우리는 '히아신스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읽는다. 전체와 부분의 구분이 이미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비-전체의 사태로 우리의 사소한 생활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그만큼만 우리에게 허락된 변화가 야기된다. "홍콩야자" 뽑아낸 자리에 "히아신스"가 들어올 때 야기한 변화만큼, '잘 자'에서 '잘 지내'로의 변화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곧바로 철회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로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나"에서 우리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시치미 떼기'를 통해서 변화했지만 변화하지 않았다는 이중화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화는 너무나 사소한 데서 발원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규모"있게 관철되는바 이는 홍콩야자와 히아신스의 이동이 일상의 한 부분이면서 거대한 지구의 자전에 관련되어 있는 태양의 "이동"으로 인해서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p. 시 60-61 / 론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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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문예』 2020-여름호 <신작 소시집/ 해설>에서

  * 임승유/ 2011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의 어떤 것』

  * 김익균/ 2010년 『시작』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근대 한국의 문학지리학』(공저)『미당 서정주와 한국 근대시』(공저),  『서정주의 신라정신 또는 릴케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