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순현_어떤 순백의 가능성(발췌)/ 믿음 : 류휘석

검지 정숙자 2020. 6. 6. 17:09

 

 

    믿음

 

    류휘석

 

 

  그의 이름을 부른 지 오래 되었다 나는 해마다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얼마 전부턴 그도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이 먼저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하는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몸을 가졌고

 

  그것이 그에게는 불리했을 것이다 몇해를 지나오면서도 그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억울해할까 그가 나의 존재를 모를지도 모르지만

 

  무수한 악몽을 지나쳐오면서 단 하나도 기억되는 얼굴이 없다

  베개를 뒤집으면 거기에 새 이름과 새 얼굴이 있고

 

  나는 매일 갈아입는다

 

  이것이 일종의 구원이라면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어디를 올려다보고 있어야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도 이름도

  그리고 나도

 

  아주 오래된 것만 같다

 

  어디선가 그가 실존하고 있다면

  그리고 억울해하고 있다면

 

  어쩐지 기쁠 것 같다

   -전문, 『창작과비평』 2020-봄호

 

 

  ▶어떤 순백의 가능설(발췌)_이순현/ 시인 

  시는 두 번의 전환을 시도한다. "그의 이름을 부른 지 오래되었"지만 내가 그에게 이름 붙이기에서 한 번,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이름 받기에서 또 한 번, 그 이후에는 "그도 이름도/ 그리고 나도" 다 내려놓고 몸으로 감정으로 공감하는 '실존하기'로 수렴된다. 그의 감정은 "억울해할까"라는 객관적인 거리 두기에서 "억울해하고 있다면// 어쩐지 기쁠 것 같다"라며 적극적이고 밀착된 태도를 보여준다. 무균의 실험실 같은 공허하고 추상적인 관념의 자리에서 뜨거운 피가 돌고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지평에 도달한다. "실존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속에 하나로 공명한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시 「믿음」은 추상과 관념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살아가는 실종의 자리로 진입하는 과정을 시론적인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관념과 추상을 뚫고 "내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시인은 오래 "기쁠 것 같다."(p. 시 177-178/ 론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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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파MUNPA』 2020-여름호 <문파가 읽은 좋은 시>에서

  * 이순현/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있다는 토끼 흰 토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