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전문-
▶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강인함(발췌)_ 이성혁/ 문학평론가
대표시의 맨 앞에 실린 「대숲 아래서」에서 보듯이 나태주 시의 또 한 축은 사랑을 잃은 자의 슬픔을 간결함의 미학을 잃지 않으면서 인상 깊게 표현하고 있다는 데에도 있다. 실연한 자의 슬픔은 서정시의 전통적인 주제다. 나태주 시는 이 슬픔을 정제된 구성과 언어로 표현하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데에 성공한다. 그것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내는 절제의 마음에 의해 가능했을 것이다. (······) 그 마음은 슬픔과 고통을 사랑의 힘으로 견디어내는 마음이기도 하다. 만역 울어버린다면, 그 슬픔을 견디고 기다림을 지속하는 마음이 흐트러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p. 시 85/ 론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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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MUNPA』 2020-여름호 <이 계절의 초대시인/ 대표시/ 작품론>에서
* 나태주/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첫 시집 『대숲 아래서』부터 『너에게도 안녕이』까지 44권, 박용래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등 수상, 現 한국시인협회 회장
* 이성혁/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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