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김윤배
화사한 마음들은 어디론지 떠난다
화사하지 않아도 어디론지 떠난다
길이 안개 속으로 휘고 상처입은 사람들 마음이 철길에 물든다
떠나는 날의 슬픔보다 돌아오는 날의 통곡이 낡은 역사를 흐려놓을 걸 알아
아주 먼 여행 중인 영혼들은 육신의 여행을 꿈꾼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작되는 여행은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이었고
몸은 지옥이었던 생의 의미를 놓고 숙려를 연장하지 않는다
사흘 숙려기간은 지났다 숙려 장소는 냉동실이었다
십 년째 숙려 중인 젊은이는 사흘의 숙려가 부럽다
사흘, 꽃이 피고 철새가 돌아오고 아이가 태어나고
노동자가 벨트에 끼어 죽고 고공시위가 계속되고 사막은
어느 곳에서나, 가령 냉동실에서도 시작된다
함께 가기로 한 고비였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 초원을 달려나가는 여인, 양의 뜨거운 피를 마시는 집시들, 낙타의 머리뼈를 타고 넘는 사막뱀은 파탄의 징후였거나 사후의 세계였거나
그것들을 그려넣을 목관의 공간은 비어 있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역에서는 바람도 떠나지 않는다
- 전문, 『현대시학』, 2020.3-4월호
▶ 지저귀는 새의 나이(발췌)_ 윤의섭/ 시인
시는 두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은 사흘장을 치르고 먼저 떠나고 한 사람은 십 년째 냉동보관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시는 현생에서 후생으로 떠나는 사후의 여행과 그런 여행을 떠나지 못한 자의 허망한 세상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사막"으로 비유된 삶의 종착역, 혹은 출발역에서 맞이하는 "숙려"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숙려기간"이 그것이 사후일지라도 어쩌면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주어진 우리 삶의 기억하지 못할 또 다른 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자의 서'처럼 펼쳐진 사후 세계의 풍경까지 산 자의 세계가 연장되어 있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무화되고 "숙려기간" 전의 시간과 "숙려기간" 후의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사유를 토대로 한 이 시는 바깥으로만 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면으로도 향하지 않으며 아직은 다른 세계로 떠나지 못한 자의 현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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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MUNPA』 2020-여름호 <기획특집-시론/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에서
* 윤의섭/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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