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속수무책/ 박지영

검지 정숙자 2020. 6. 3. 14:59

 

 

    속수무책

 

    박지영

 

 

  이런 세상이 올 줄 몰랐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세상을 지배했다

  가만있다가 당해버렸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나날이 현실이 되다니

  세상이 나를 가두고

  집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다니

 

  너를 믿을 수 없고

  나도 믿을 수 없어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앞만 보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올지도 모르겠다

  둔탁한 망치 소리, 피아노 건반 두드리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청소기 소리

  사이로

  파전 냄새를 따라가며

  축 처져 있던 슬픔의 무게를 간신히 견딘다

 

  마당 구석 석류나무는 더 붉은 꽃을 피워

  어두운 내 영혼을 쓰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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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동네』 2020-6월호 <詩 # 2> 에서

  * 박지영/ 199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검은 맛』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