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한 시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각주 4
정재학
아홉 살 때 삼척 해변에 서 있다가 갑자기 센 파도가 들이쳐 쓰러졌다. 바다로 휩쓸려 가던 순간 누군가 내 오른손을 잡아주었다. 얇게 뜬 눈위로 급한 파도가 쓸려 나가고 누군가의 강한 윤곽이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 굵은 목소리.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의 큰 산이 되었다. 너무 큰 산이라 걷고 또 걸어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다투기라도 하듯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걷기도 하고 나는 때로 그 산에서 호수로 고여 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내가 돌봐야 하는 작은 화분이 되어 있었다. 줄기가 쓰러질까봐 지지대를 꽂아 줄로 엮기도 했는데 결국 내 손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닷가에서 아버지가 잡아주었던 것처럼 힘껏 잡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야윈 손을 조심스럽게 꽉 잡아본 적이 있다. 모래처럼 쓸려가는 아버지를 붙들기 위해.
----------------
* 『시인동네』 2020-6월호 <詩 # 2>에서
* 정재학/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 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흔이 내린다/ 유병록 (0) | 2020.06.02 |
|---|---|
| 불 꺼진 서재/ 김성렬 (0) | 2020.06.02 |
| 손톱 깎기/ 양곡 (0) | 2020.06.01 |
| 먼 시간에 대한 반응/ 휘민 (0) | 2020.06.01 |
| 모친/ 박일만 (0) | 202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