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먼 시간에 대한 반응/ 휘민

검지 정숙자 2020. 6. 1. 19:19

 

 

    먼 시간에 대한 반응

 

    휘민

 

 

  돌아갈 수 없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아주 작은 세계의 귀퉁이일 뿐인데

  사단 접지의 리플릿을 다 펼친 것도 아닌데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가난을 동정하는 선한 눈빛으로 글줄을 따라갔었다

  그러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내가 발견한 것은

  거울 저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얼굴이 붉은 너는 표정이 없다

  어쩌면 심장 아래 커다란 공기주머니를 숨긴 민어

  어쩌면 닫힌 문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송곳

 

  데메르 아레칸

  너는 볼리비아에 사는 열한 살 남자

  안데스고원이 고향인 케추아족의 후예

  너의 눈빛은 적선을 거부하고 있다

  제 몸의 비중을 슬픔의 비중과 일치시키기 위해

  뱃속의 부레를 녹여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다

 

  나는 너의 눈을 검정색 마그네틱으로

  냉장고 문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이제 나는 너를 마주볼 수 있다

 

  하나의 세계가 지나가도

  질문이 뒤따라오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때 불현듯 현재는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책장을 넘기기 전의 나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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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와문학』 2020-여름호 <시> 에서

  * 휘민/ 1974년 충북 청주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 2011년 ⟪한국일보⟫ 동화 당선,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 『라 벨라 치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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