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서평

대상 a에 대한 고전적 사랑/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9. 10. 13. 01:08

 

<해설>

 

 

    대상 a에 대한 고전적 사랑

    -김혜숙 시집『비밀이다』(시산맥사, 2019. 9.)

 

     정숙자/ 시인

 

 

     대상 a란 주체가 자신을 주체로 구성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낸 기관과 같은 것입니다.

     -자크 라캉-

 

                                                              

  1.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는 현대로써 충만하다. 먼 과거일지라도 그 당시에는 ‘현대’였으며 늘 새로웠고 좀 더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왔다. 그렇게 인류는 어제를 버리며, 지우며 또는 그 토대 위에서 없던 길을 닦았고 층위를 소비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분포된 게 아니라 유독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한 일이었다. 그 사이 멸종된 동식물군이 부지기수라고 들었다. 인간은 타 종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일무이의 지적 존재였으므로 순응과 적응을 넘어선 존재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 주위에 없는 것, 심지어 들리지 않는 것조차 잡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를 기록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그 없는 길, 저 너머의 길을 닦는 과정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나 바람소리와는 다른 언어를 필히 고안해야만 했고, 그 염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섬세한 감정과 이성을 표현/간직하며 때때로 육체 이상의 삶, 영혼으로서의 삶과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거기서 탄생한 꿈의 세계, 문학은 시공의 경계를 가로질러 욕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필묵을 고안했다.

 

 

  달빛은 마음으로 내려오게 하고

  옛 자개장 옆으로

  백매白梅 두어 가지를 기대 놓으니

  빼어난 시다

  절창의 시조창도 들리누나

 

  그 언덕의 황홀한 청초를 꺾어온 죄

  막중할지라도

  이 싯귀 간절히 사랑하니

  용서를 빈다

 

  고귀한 멋

  고운 향기로 위로받는 봄 어귀

  매화에 편승하여

  죄도 덮고

  고전적 사랑으로

  눈시울 흠뻑 적셔볼까 함이니

   -「고전적 사랑」전문

 

 

  고전이라는 명사에는 ‘살아남았음’이라는 뜻이 내포된다. 오랜 세월을 경유하고도 현대를 비춰주지 못한다면 ‘고전’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에는 그에 상응하는 진선미의 가치가 따르게 마련이다. 요즘은 사회 각 분야에 인재가 넘쳐난다. 우리 시단도 백가쟁명의 광장임을 부정할 수 없다. 기법도 다양하거니와 내용 또한 여기저기서 각을 다툰다. 어느 모서리는 햇빛을 정 맞아 순식간에 별이 되는가 하면 어느 바윗돌은 그늘을 벗어나기조차 어렵다.

  이 각축의 장에서 흔들림 없이, 자기 본래의 어법과 진정어린 마음의 빛을 풀어내는 일은 얼마나 여유롭고 의연한가.「고전적 사랑」에서 “옛 자개장 옆으로/ 백매白梅 두어 가지를 기대 놓으니/ 빼어난 시다” 이런 구절에서는 티끌 한 점 없는 조선 선비의 정신을 보는 듯하다. ‘현대’라는 시간의 셈법이 무색할 정도다. “매화에 편승하여/ 죄도 덮고/ 고전적 사랑으로/ 눈시울 흠뻑 적셔볼까 함이니” 통시적 언어를 공시태로 새겨놓은 이 한 편의 시는 너끈히 미래까지도 아우를 수 있으리라.

  가뜩이나 심상 표출을 기휘忌諱하는 작금의 시적 환경 속에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던 터에, 이토록 차분한 정서를 대하는 것은 모처럼의 휴식과도 같은 해후이다. “죄도 덮”는다 하였으나, 여기서 ‘죄’의 의미는 통념적 ‘죄’가 아니라 투명에 스민 정화흔淨化痕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1877-1962, 85세)는 1943년에 발표된『유리알 유희』를 “2,400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박종서 옮김. 을유문화사, 1980. p-3.)이라고 했다. 약 400년을 앞당긴 고요에의 권유이자 위로였던 것이다.

 

 

  2.

  지금은 가히 춘추전국의 시대다. 수많은 이론과 경험들이 부딪히며 또 다른 새로움을 생산하고 있다. 능산적 행보는 속도가 완만하지만 소산적 흐름은 초속을 다툰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일컬어 지상에서 벌어지는 ‘명멸의 속도’라 칭해봄직하다. 어제의 별자리가 오늘 하얘지는가 하면,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든 혜성 하나가 또렷한 빛을 발산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목하, 타의 이목을 집중시킨 혜성이 항성의 위도와 위상을 지켜낼 수 있을지는 세월과 격랑이라는 시금석의 답변을 기다려야 한다.

  1988년『현대문학』추천완료를 통해 등단한 김혜숙 시인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력 30년 동안 그 모든 현장을 목격했고 몸소 겪으며 시집『비밀이다』를 엮었을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비밀은 ‘없는바’가 아니며 다만 침묵에 저장된 파일이었음을 여러 시편들이 증거하고 있다. 시인에게 ‘침묵’과 ‘허공’은 등가의 관계이고, 혼자만 여닫을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였다. 뿐만 아니라 그 공간은 장소에 한정되지 않는다. 즉 시간의 장소이기도 했으므로 현재와 과거가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어이 빠져나가는

  마른 꽃무더기

  뒤뜰 풀숲에 던졌다

  허공 한 줌을 뿌렸다

 

  조각달 작은 별들 사이로

  넘어지는 그림자

  목숨이 저런 것이네

  생애가 저런 것이네

 

  내 안을 채웠던

  허공의 이름들

  제대祭臺에서 받아 안은

  장미의

  안개의

  백합의 기도의, 눈물의, 순결의

  축 처진 미래도 까칠함도 고귀함 아니던가

  그래도 영원은 아니라서

 

  모두가

  허공에서 사별하네

  풀썩, 풀밭에 눕네

   -「허공」전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화자에게는 떠나보낼 수 없는, 저버릴 수 없는 대상이 있다. 돌아오고- 살아오고- 함께하고 있는 그 시간이 시인을 외롭게도, 슬프게도, 행복하게도 했을 것이다. “기다림으로 새겨놓은 백매白梅 한 그루”는 “삭풍이 지녔던 비수도” “건드리지 못”했다. “고백 없이도 꼭 만나야 할 사이”(「첫 약속」)의 누군가가 시인을 오늘까지 “백매”이게 했던 것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홍사용「나는 왕이로소이다」)

  ‘허공’이란 기댈 데 없는 영혼들에게 얼마나 너그러운 인격인가. “총총한 별들과 여럿의 달이 맴도는/ 어여쁘고 홀가분한 집”이기도 하고, “시로 보이는 곳/ 아무것도 넘볼 것 없는 땅의 구석”(「따뜻한 곳」)이기도 한 유신有信이자 사람 이상의 붕우朋友가 되는 셈이다. 말하지 않아도 감지하며, 숱한 아픔을 공유하며, 어떤 추억이라도 함께 열람할 수도 있지 않은가. 목메도록 간절한 바람을 거기 심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허공에서 사별하”는 까닭을 알 수 없을 것이리라.

   “내 안을 채웠던/ 허공의 이름들” 시인의 삶은 “장미의/ 안개의/ 백합의 기도의, 눈물의, 순결의” 시간을 거쳐 “백매白梅”로 뿌리내렸다. 장미가 백매가 되기까지, 백합이 백매가 되기까지, 지상에서의 작별을 다시금 “허공에서 사별하네"라고 담아내기까지 그 어마어마한 고독을 잡담 제하고, 마치 한 그루 설중매와도 같이「허공」에 수놓았다. 신령스런 풀은 겨울에 더욱 푸르러 영초동영靈草冬榮이라했던가. 시인의 침묵과 허공에 묻은 비밀은 이렇듯 지상의 노래로 피어났다.

 

 

  3.

  “고독을 끌며 떠난/ 그림자도 아프던 사람/ 해가 지지 않았는데 미리 어둠에 닿아/ 어둠이 된 사람”(「소야곡」)이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그림자도 아프던 사람”의 아픔은 과거시제로 넘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깊숙이 화자의 삶에 합쳐진 통증이다. “그림자”까지도 “아프던 사람”의 운명을 시인은 오늘도 그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돌아올 리 없”을지라도, “말은 버리고 침묵에 길”들며 “사유하는 침묵의 안쪽을 거듭 사모하”는 삶은 진정 시 이전의 시라 할만하다.

  침묵은 의식하면 이성이고, 느끼지 못하면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침묵은 가장 가까운 내 안의 즉자이자 대자가 아닐까. 제아무리 참담한 절망과 고독감에 휩싸인다할지라도 침묵속의 대자/즉자와 의논할 수 있다면 올바른 합명제로의 도달이 가능하다. 즉 “모순은 새로운 관계의 ‘계기’가 된다.”(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 인성기 외 옮김. 들녘, 2012. p-488.)니 말이다. 각성된 침묵이야말로 사유의 통로이며 무의식이라는 칩 속에 자양을 공급하는 행위이다. 김혜숙 시인의 “비밀” 역시 침묵에서 길어 올렸으리니.

 

 

  칠월, 흰 목련 한 송이 애틋이 피었다

  ‘댕그랑 별 하나

  꽃 속에 떨어진다

  무슨 소릴 냈으랴만 나는

  그 소리 들을 것 같고

  무성한 잎새들 높은 끝

  딱 한 송이 목련을 받들어

  하늘에 바치고 있었다

 

  하늘은 목련 꽃잔 받을 것이고

  꽃잔 속엔 별이

  빛날 것이다 

 

  낮에 만난 목련

  밤에 생각할 때

  목련 속이 궁금할 때

  나도 별처럼 떨어져

  깜빡 깜박 꽃잠 자고 싶다

   -「여름 목련」전문

 

 

  시인이 선택한 색깔은 줄곧 ‘흰’색이다. “백매”와 “백합” 칠월에 핀 “목련”조차 “흰 목련”이라고 한다. 사실 목련은 봄꽃이지만 시적 허용이니만큼 겨울이라 해도 무관한 발언이다. 순수와 순결, 고귀함과 신성함 등의 상징인 흰색이 시인에게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법하다. 하 많은 꽃 중에 목련을 예인한 점도 매화나 백합과 거리가 멀지 않게 엮인다. 목련은 나무에 핀 연꽃이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그 숭고함과 정신에 비추어 동일성과 함축/압축의 내포를 지닌다.

  그런데 시인은 왜 제철 꽃들을 놔두고 “목련”을 “칠월”에 병치했을까. “분홍 장미 몇 송이와 아스파라거스가 전부이던/ 부케의 몸을/ 떨며 부축하며 성당 계단을 올랐지”(「흔적」). “깊숙이 남은 웨딩드레스가/ 회한도 없이 둘러댈 변명도 없이/ 시가 거니는 곳에서 만나자 한다”(앞의 시). 이 책 어디에도 화자의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구체성을 띠지 않는다. 이때 그 대상을 이해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설령 화자의 의도에서 좀 빗나갈지라도 그것은 오독이 될 수 없다.

  그 점이 오독으로 작용하지 않는 까닭은 오히려 수용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콘텍스트(context) 없이 오로지 텍스트(text)만을 읽어나가는 필자에게 각별히 와 닿은 한 구절이 있다. “하늘은 목련 꽃잔 받을 것이고/ 꽃잔 속엔 별이/ 빛날 것이다// 낮에 만난 목련/ 밤에 생각할 때/ 목련 속이 궁금할 때/ 나도 별처럼 떨어져/ 깜빡 깜빡 꽃잠 자고 싶다”가 그것이다. 현실에서 실재계로의 그리움 끝에 얻은 이 일절은, 진정 외로이 사랑을 지켜내는 자에게 주어진 뮤즈의 선물일 것이다.

 

 

  4.

  김혜숙 시인은 그동안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이번이 네 번째 시집인 점으로 볼 때 다작은 아니었던 듯싶다. 이제 네 번째 시집을 묶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스스로에게 주문한 것으로 짚인다. “바람은 제 몸만큼 놀다 떠난다/ 자연은/ 모두/ 죄 없다”(「죄 없다」)라든가 “헤어져야 하는 만남이 서로 분주하다”(「만남」), “오늘은 쾌청이라고 쓰는/ 한 장의 시구를 엮을 수도 있으리니”(「잠」) 등 틈새의 빛과도 같은, 이런 편린들이 자아를 다잡고 다독였을 것이다. 새로움이란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니만큼.

  인생 여정이란 바라는 대로 급회전되지 않는다. 한 사건으로 인해 몇 달이나 몇 년이 흐르거나 운명이 휘어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시간의 문제를 넘어 생애의 궤적으로 굳어지며 남게 된다. 지난한 행로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선택하며 욕망하는 힘으로 하루하루를 이끈다. 시란 바로 그러한 영혼이 발명한 넥타르(nectar)이자 에너지(energy)가 아닐까. “라캉이 ‘대상 a’라고 불렀던 욕망의 원인”(장철환 『돔덴의 시간』, 파란, 2017. p-149.)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좀 더 무료하고 검은 강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이 산에선 나도 한 척 배로 여기마

  떠돌다 떠돌다 돛도 없이

  오로지 출렁인 버릇대로

  휘적휘적 떠돌다 산허리 한 귀퉁이

  바위로 정박해라

 

  보이지 않는 것

  기다리는 것

  연민하는 것이

  낡은 배가 거느리고 온 대체적인 사유겠거늘

   -「무위無爲의 근황」부분

 

 

  쓸쓸한 마음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헤매고 다닌 발자국도

  두 손으로 불러 모은다

 

  나무를 세우고

  바람을 부르고

  한 송이 꽃망울을 물감으로 찍어 바르던

  그 손길

  그러나 이제껏 내가 나를 그린 일 있었던가

  나를 제대로 그려본 일 있었던가

  긴 세월 나의 몰골은

  저녁으로 깊어 가는데

  아직도 돌아볼 것이 많은 푸른 낭만도 있어

  숨죽여 그려야 할 내 영혼을 기다리네

  마침표가 잘 찍힐 때까지

  나를 추스르며 그릴 것이다

  오마지 않는 길도 그릴 것이다

  아름답게 살기 위한 길

  아름답게 죽기 위한 길

  찾을 것이다

   -「다시 그림 그리기」전문

 

 

  현대시의 역사를 통틀어 요즘보다 더 다채로운 스펙트럼은 없었던 것 같다. 식물군이 무색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지면마다 펼쳐진다. 이쯤이면 시세계의 등고선을 한층 올려 잡아도 무방하리라. 초원에 이르러 무수한 종류의 나무와 꽃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개성에 어울리는 글을 읽게도 쓸 수도 있게 된 셈이니 말이다. “나를 추스르며 그릴 것”이며, 꼭이 “오마지 않는 길도 그릴 것”이요, 그게 곧 “아름답게 살기 위한 길”이며 “아름답게 죽기 위한 길”일 것이므로.

  시인은「꽃의 당도」에서 “달맞이꽃도 꽃가루 옮겨 줄 벌이 다가오면/ 단물의 당도가 높아진다는데/ 나는 단물도 없으니/ 꽃보다 못하다”고 노래했지만, 곧바로 다음 행에서 “혹시 쓴물이나 내어주는 나는 아닌가” 생각에 잠겨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다. “저녁쯤의 달맞이꽃을 기다리면/ 나의 당도가 높아지려나/ 자꾸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한 마디가 화자와 더불어 독자의 심정까지도 밝아지게 한다. 시와 시인의 덕목이란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결국 우화의 깃을 펴고야 마는.

 

 

  오래도록 가부좌하던 난분蘭盆

  우러러보던 근심 한 줄기가

  입술을 연다

  필시, 내게 할 말이 있을 터,

  곡진한 기다림에게

  낮고 여리게 말하고 싶은 거

  작은 종소리 울린 것 같아라

  실눈 뜨는 눈언저리

  촉촉한 슬픔 끼 알아채는

  애간장 저리는 가만한 때

  홀로 한 겹 유한有限을 여는구나

  깊은 비밀이 생기는구나

  너무 고운 비밀은 아픔이구나

  애잔한 사랑은 더디게 더디게 오느니

  밤 깊자

  귀뚜리 한 마리 또르르 굴러와

  별빛 몇 데리고 들어선다

    -「비밀이다」전문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을까. 더구나 영영 이별일진대 그 슬픔은 화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와중에 백매白梅의 향기를 잃지 않는다는 건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예로부터 묵객들이 가장 많이 다루어 온 시제도 별리의 고통이 아니었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본성은 다르지 않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원한 여성성은 저 높은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알랭 바디우『사랑 예찬』, 조재룡 옮김. 길, 2010. p-34.)고 말한 바와 같이, 시인의 별리는 기다림의 연장선이다. “낮고 여리게 말하고” “작은 종소리 울린 것 같”은 일상이 고요한 기도로 간직된다. “근심 한 줄기가 입술을” 여는 난분을 응시하며 자연과 내통하는 시인의 곡진한 비밀이 애잔하고도 고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