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판단력 펌핑(pumping)_칸트 프리즈/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1. 9. 26. 02:58

 

 

   판단력 펌핑pumping

     -칸트 프리즈

 

    정숙자

 

 

  진화 앞에서 일생이란 턱없이 짧다

  잿빛 하나를 어쩌지 못한다

  잿빛 하나가

  명징하게!

  유쾌하게!

  치유되려면

 

  내가 놓고 간 인생을 자식이 살고, 자식이 놓고 간 인생

을 또 그의 자식이 (치밀히) 살아내야 할 것이리라. 그리

하여 무수한 전생을 쌓아올린 다음에라야 참담한 잿빛은

밝고 단단하고 온화한 뼈로 진화하리라.

 

  진화 앞에서 개인의 수명이란 얼마나 짧은 시도인가

  진화 앞에서 개인의 수양이란 얼마나 서툰 발화인가

 

  천년을 두고

  만년을 두고

  조금씩 내디디는 것

 

  그것이 진정 진화의 정석이라면 일억 년 혹은 수수억

년 진화를 거듭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상처내지 않게끔 될

까? 왼팔이 오른팔을 자르지 않게끔 될까? 서론에 불과한

일백년 안쪽, 난만히 피어오른 잿빛을 끼고

 

  모처럼 고요에 실려 온 쪽배를 탄다

  얼핏얼핏 황홀이 비쳐 든다

  가끔씩 찾아와

  위안을 줬던!

  행복을 깎던!

  내세의 전생 곁으로

  -『주변인과 詩』2011-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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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