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과 지평
-칸트 프리즈
정숙자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파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는 이
미 기계의 것, 파가 다듬어지는 동안-시간은 비로소 다른
차원으로 출타한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 전에 시간을 벗어
난 사람과 풍경과 소리들이, 혹은 지금 파밭에 파 씨 뿌리
는 기계들이 혼재한다. 그리고 그 파밭은 곧 수몰될 수도,
사원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파 다듬는 시간엔 온갖 것을 다 건드리되 파에
관한 발상만큼은 떨어뜨린다. 파는 이미 출발선에 들어왔
고 계획안을 이행 중이고 목표는 선명하다. 어떤 불만이
나 조건도 내세움 없이 기계는 부지런히-가지런히 파를
까고 씻고 바구니에 건진다. 시간은 모처럼 아무것도 걱
정하지 않는다. (건강한 기계가 착오 없이 돌아가는 한)
파 다듬으며 파 생각만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파 다
듬으며 ‘별을 생각한다’고 하자. ‘안데르센을 생각한다’고
하자. 바람보다 멀리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하자.
고장 나지 않은 기계이걸랑 다만 ‘고마워한다’고 하늘에
게 말씀드리자. 살면서, 살아가면서 ‘삶’만을 생각하지는
말자.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검은머리도 파뿌리에 맡겨
버리자.
-『애지』2011-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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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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