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33
정숙자
연말// 세상에 속아봤다는 건 사람한테 속아봤다는 셈이다. 속았다는 건 내 어리석음의 인증이고, 상대에게 먹잇감으로 보인 적 있었음의 실증이다.
아니다, 아닐 수 있다. 세상에 속아봤다는 건 약함/착함의 행적일 수 있다. 상대가 속이는 줄 알면서도 눈감아주었던 미필적선의! 누구도 경험하는 일.
어쨌든 아픈 패는 이쪽으로 넘어온다. 기쁨의 배분은 고르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불행의 할당 역시 매한가지다. 모든 기쁨이 다
내 것일 수도 네 것일 수도 없다.
내가 비둘기를 속인 것일까. 연말 모임에 들락거리다 보니 산책을 거르는 날이 잦았다. 하루 이틀은 기다렸을 것이것이고, 사나흘은 실망했을 것이고, 그 이후엔 잊기로 했을 것이다. 보름 전후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참새들까지도 흔적이 없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한지도 몰라. 그들로서는 어떤 억측도 예측이 될 수 있지!
조카: 비둘기는 유해동물로 지정됐어요. 모이 주면 안 돼요. 나: 그럼 굶어 죽으라는 거잖니? 개체 수를 줄이려면 다른 방법-거세를 시키든가 해야지.
누군가는 속고, 어디선가는 속이며 난다. 약함/착함의 이유만으로 곤경에 처하는 종들. 살-처분, 매몰… 이런! 일어서볼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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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엠포엠』 2018-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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