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눈 뒤의 눈
- 이웃들
정숙자
사람을 읽는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정확히! 쉽사리!
처음 들어선 도서관일지라도 망설임 없이 단 한 권을 뽑아드는 학
자? 그럴 수 있다. 그가 전문가라면. 작년 이맘 때, 모 잡지사 송년 모
임에 가기 위해 나는 지하철을 탔다. 막 자리에 앉아 안경을 끼고 책
을 꺼내는 순간… 걸인(남자) 한 명이 출입문으로 들어오더니 일순
의 주저도 없이 내 앞으로 직행, 구걸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헐! 내가 부엉이로 보이나? 이런 단도직입… 뭐지? 암튼 좋아. 나
도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그대의 직관과 용기에 재 뿌릴 위인은 아니
지. 음~ 그대는 걸인일망정 족집게로군. 헛집지 않았음이야. 얄팍한
지갑에서 천 원짜리 석 장을 빼주었다. 걸인은 두 번 절했다. 세 번째
머리와 어깨를 숙이는 찰나 "절 절 고만하세요" 쾌히, 쾌히.
걸인은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출입문이 열리자 곧장 내렸다. 전철
은 그의 뒷모습을 지우며 흘렀다. 모두가 봤겠지만 모두가 무관심-
평온했다. 그러나 서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순간은 고스란히 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저 정도는 돼야지 대체 나는 뭔가. 일생을 기
울여 시를 쓰면서도 촌철의 순간을 찍지도 다루지도 못하다니.
평범은 순간이 될 수 없다
평범은 돌기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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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람』 2018-봄호 <시와사람 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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