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빠른, 눈 뒤의 눈

검지 정숙자 2018. 3. 19. 01:46

 

 

    빠른, 눈 뒤의 눈

     - 이웃들

 

    정숙자

 

 

  사람을 읽는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정확히! 쉽사리!

 

  처음 들어선 도서관일지라도 망설임 없이 단 한 권을 뽑아드는 학

자? 그럴 수 있다. 그가 전문가라면. 작년 이맘 때, 모 잡지사 송년 모

임에 가기 위해 나는 지하철을 탔다. 막 자리에 앉아 안경을 끼고 책

을 꺼내는 순간 걸인(남자) 한 명이 출입문으로 들어오더니 일순

의 주저도 없이 내 앞으로 직행, 구걸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헐! 내가 부엉이로 보이나? 이런 단도직입 뭐지? 암튼 좋아. 나

도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그대의 직관과 용기에 재 뿌릴 위인은 아니

지. 음~ 그대는 걸인일망정 족집게로군. 헛집지 않았음이야. 얄팍한

지갑에서 천 원짜리 석 장을 빼주었다. 걸인은 두 번 절했다. 세 번째

머리와 어깨를 숙이는 찰나 "절 절 고만하세요" 쾌히, 쾌히.

 

  걸인은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출입문이 열리자 곧장 내렸다. 전철

은 그의 뒷모습을 지우며 흘렀다. 모두가 봤겠지만 모두가 무관심-

평온했다. 그러나 서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순간은 고스란히 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저 정도는 돼야지 대체 나는 뭔가. 일생을 기

울여 시를 쓰면서도 촌철의 순간을 찍지도 다루지도 못하다니.

 

  평범은 순간이 될 수 없다

  평범은 돌기 없이 이어진다

 

   -------------

  *『시와 사람』 2018-봄호 <시와사람 초대석>

'그룹명 > 나의 근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에 관한 설계도를 열람하다  (0) 2018.03.22
독거시인  (0) 2018.03.20
틀 효과(framing effect)  (0) 2018.03.18
묵학  (0) 2018.03.17
화살과 북  (0) 2018.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