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칼의 벡터

검지 정숙자 2017. 11. 30. 02:06

 

 

    칼의 벡터

 

    정숙자

 

 

  온가족 한자리 모여

  골목골목 이야기 나누었다

  별난 색 아니어도, 천지에 수북수북 눈이 쌓여도

  칼끝에서 풀려난 새빨간 끈은 긴긴 밤을 함께 데웠다

 

  그 창호엔

  사과 속 사과씨조자

  떳떳하고 또렷한 빛을 품었다

 

  개성 찾아야 한다

  독립심 길러야 한다

 

  형제도 자식들도 각기 제 방문 닫아 걸 무렵

  사과는 더 이상 끈을 풀지 못했다

  반쪽으로, 다시 반으로, 반의반으로 씨앗도 햇빛도 해체되었다

 

  그래도 그땐 괜찮았다고,

  전후좌우 그 손길 칼날마저도 따뜻했다고,

  사샤서셔 씹는 소리도 먹힐지라도 즐거웠다고,

 

  말없이 말하는 사과의 말 옮겨 적는 밤

 

  "이제 이제는 갈아버리지. 1초에 드르륵 돌려버리지. 후루룩 마셔버

리지. 시인들만이 시 속에서만 리본 풀기로! 하지만 그들도 새 물결 받아들

이지. 사과든 포도든 돌려버리지. 실제로는 그래버리지. 거지반 그래버리면

서도 사과 깎는 표현만큼은 여태껏 고전적이지."

 

  "이제 이제는 형제도 자식도 다른 방이 아니라 다른 지붕에 살지. 갈

지 못할 것, 돌리지 못할 것, 바꾸지 못할 것이란 없지. 소나무 위 별빛조차

도 광공해와 빌딩에 질려 귀까지 핼쑥해졌지. 시인 중에도 몇몇 시인들만이

사과 깎는 표현만큼은 여하튼 클래식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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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2017-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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