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벡터
정숙자
온가족 한자리 모여
골목골목 이야기 나누었다
별난 색 아니어도, 천지에 수북수북 눈이 쌓여도
칼끝에서 풀려난 새빨간 끈은 긴긴 밤을 함께 데웠다
그 창호엔
사과 속 사과씨조자
떳떳하고 또렷한 빛을 품었다
개성 찾아야 한다
독립심 길러야 한다
형제도 자식들도 각기 제 방문 닫아 걸 무렵
사과는 더 이상 끈을 풀지 못했다
반쪽으로, 다시 반으로, 반의반으로… 씨앗도 햇빛도 해체되었다
그래도 그땐 괜찮았다고,
전후좌우 그 손길 칼날마저도 따뜻했다고,
사샤서셔 씹는 소리도 먹힐지라도 즐거웠다고,
말없이 말하는 사과의 말 옮겨 적는 밤
"이제… 이제…는 갈아버리지. 1초에 드르륵 돌려버리지. 후루룩 마셔버
리지. 시인들만이 시 속에서만 리본 풀기로! 하지만 그들도 새 물결 받아들
이지. 사과든 포도든 돌려버리지. 실제로는 그래버리지. 거지반 그래버리면
서도 사과 깎는 표현만큼은 여태껏 고전적이지."
"이제… 이제…는 형제도 자식도 다른 방이 아니라 다른 지붕에 살지. 갈
지 못할 것, 돌리지 못할 것, 바꾸지 못할 것이란 없지. 소나무 위 별빛조차
도 광공해와 빌딩에 질려 귀까지 핼쑥해졌지. 시인 중에도 몇몇 시인들만이
사과 깎는 표현만큼은 여하튼 클래식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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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2017-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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