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정숙자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해설 : 이찬

검지 정숙자 2017. 9. 10. 01:41

 <해설>

 

  초월적 열망의 아날로지, 자유간접화법의 콜라주

   -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2017. 파란) 

 

   이찬/ 문학평론가

 

 

  1.

  정숙자의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는 제 일생 전체를 시 쓰기와 책 읽기에 바쳐 온 자의 순도 높은 정념과 충실한 시간의 깊이가 빼곡히 주름져 있다. 이는 지난 시집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바이긴 하지만, 이번 시집에선 “내 목에도 슬슬 주름이 끼어든다. 까닭인즉 신이 내 목을 쥐었다는 것. 서서히 조이고 있다는 것. 결국엔 꽉 막히고 말리라는 것”(「늙」)으로 표상되는 ‘죽음’을 미리 앞질러 달려가 보는 선구적 의식을 통해, 훨씬 더 웅숭깊은 존재론적 광휘를 드리운다. 가령 “나에게는 삼십 년 넘게 위안을 주는 공책이 한 권 있다. 열서너 살 때부터 여기저기 읽고 베낀 시들로 채워진 보고다”(「시와 생활」, 『밝은음자리표』, 종려나무, 2008)라는 시인의 고백록처럼, 제 삶의 보람과 가치를 시 쓰기의 마력과 인문적 교양의 세계에 송두리째 봉헌한 자에게 ‘죽음’은 존재론적 불안과 공포만을 안겨다 주는 절대적 타자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작 어떤 게 죽음인지/환상인지/삶인지 한 조각도 풀지 못한 채/덜 자란 내 속내는 오늘도 어둠을 짓고/바람에게조차 물음을 뜬다”(「「무릎_學」)로 축약되는 실존적 성찰과 초월적 열망을 추동시키는 촉매로 작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 이제 아마추어보다는 잘 죽어야겠다

  평균 15년에 한 번 꼴로 연습한 죽음

  좋아좋아 이제 프로니까 프로답게 죽어야겠다

  가볍게, 누구도 힘들지 않게 원만하게 죽어야겠다

   나는 죽음의 프로다―교통사고 트랙부분

 

 

  들뢰즈 만해 미당 보들레르 보르헤스

  소월 아쿠타가와 연암 융 청마 춘원 카프카 칸트

  무덤마저 지워진 종친들 헤세 릴케 붓다

  서고를 메운 그 나무들 사리들의

 

  ―정언

 

  절망도 열정이다 어떠냐 붉은 게 꽃이 아니면

  어떠냐 푸른 게 피눈물이면! 멈추지 마라 눕지 마라

  다시 죽지 않아도 될 세계로 직진/진입하라

  P.S.: 죽기 전에 죽어라 그리고 압도하라 체념/비관 따위

  절망 추월하기부분

 

 

  “나는 죽음의 프로다”라는 시편의 표제어를 보라. 이번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의 한복판엔 무수한 ‘죽음’의 형상들이 가로지르고 있지만, 저 표제어만큼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근본주의자의 태도와 자세를 명징하게 예증하는 것은 없다. 또한 첫 구절부터 나타나는 “아마추어보다는 잘 죽어야겠다//그동안엔 죽음이 날 지켜봤지만 이제 내가 죽음을 응시해야겠다/죽음이 날 품위 있게 데려가지 않으면 혼내 줘야겠다/“나는 프로다”/목소리 깔아야겠다” (「나는 죽음의 프로다―교통사고 트랙」)라는 ‘죽음’을 향한 선구적 체험의 이미지들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잠긴 강력한 초월의 열망을 반증한다. 결국 시인은 “아마추어”라는 말로 표현된 범속한 일상인들의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어서려는 살뜰한 의지를 공표하고 있는 셈이며, “프로”라는 시어로 표현된 초월적 교양인의 경지로 제 스스로를 드높이려는 열망을 “죽음이 날 품위 있게 데려가지 않으면 혼내 줘야겠다”는 아이러니의 수사법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시인이 그야말로 절대적 타자로 덮쳐 올 수밖에 없을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의 원천은 그녀가 “열서너 살 때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루어 온 순결한 상아탑의 추구에서 온다. 가령 「절망 추월하기」에 나타난 “들뢰즈 만해 미당 보들레르 보르헤스/소월 아쿠타가와 연암 융 청마 춘원 카프카 칸트/무덤마저 지워진 종친들헤세 릴케 붓다 외/서고를 메운 그 나무들 사리들”이라는 구절들의 마디마디에 깃들어 있을 시인의 꾸준하면서도 충실한 상아탑 쌓기의 시간들을 온몸으로 가늠해 보라.

  여기에 열거된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그녀의 교양의 수준과 높이를 윤색하려는 나르시시즘의 수단이거나, 그 가면극의 무대를 휘황한 빛으로 에두르려는 미장센(mise-en-scène)의 도구로 기능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와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언뜻 보기에 좋은 시 한 편은 어휘의 절묘한 조합인 것 같지만, 실은 희로애락이 잘 승화된 언어의 풍경이다” 또는 “그렇게 시만을 사랑한 대가로 나에게는 바위 계곡을 타야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책 읽기와 세상 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신발에 선혈이 고였다. 배우자를 만나는 일에서부터 어느 것 하나 학력의 조롱을 받지 않았던 부분이 없다”(「시와 생활」)라는 참담한 고백이 증언하는 것처럼, 시인에게 저 무수한 저자들로 표상되는 상아탑의 세계란 그녀의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아니, “선혈이 고”일 수밖에 없었을 그녀의 몸의 자취일 것이다. 그리하여, 「절망 추월하기」에 나타난 “무덤마저 지워진 종친들”이나 “절망도 열정이다 어떠냐 붉은 게 꽃이 아니면/어떠냐 푸른 게 피눈물이면! 멈추지 마라 눕지 마라” 같은 이미지들은 기성의 문단과 학문의 시스템에서 방외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힘겹고 눅진한 향학열과 고단한 실존의 역사를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감으로 곧추세운다.

 

 

  2.

  나는 항상 유골이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떠도는 유골이

다. 나는 골백번도 더 죽었고 골백번도 더 눈뜰 수밖에 없

었던 유골이다. 나는 늘 어리석어서 죽었고, 어리석은 줄

몰랐다가 죽었고, 어리석어서 살아났다. 더 죽을 이유도

없는데 죽었고 더 살 필요도 없는데 살았다.

 

  유골에게 걸칠 거라곤 바람뿐

  유골에겐 바람만이 배부를 뿐

 

  그래도 나는 저놈의 태양을 사랑하노라. 저놈의 태양

말고 무엇을 또 사랑할 수 있단 말이냐. 파도야, 그리고 너

를 사랑하노라. 파도야! 파도야! 함께할밖에 없노라.

   ―「몽돌」부분

 

 

  첫머리에 나타난 “나는 항상 유골이다. 살았어도 죽었어도 떠도는 유골이다. 나는 골백번도 더 죽었고 골백번도 더 눈뜰 수밖에 없었던 유골이다”라는 반복적 죽음의 형상들은 모든 유기체에게 깃든 무기체로 되돌아가려는 근원적 충동, 또는 외부 세계와의 교호 작용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흥분량을 영(zero)의 상태로 가라앉혀 영원토록 그것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벡터인 ‘죽음충동(death drive)’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늘 어리석어서 죽었고, 어리석은 줄 몰랐다가 죽었고, 어리석어서 살아났다. 더 죽을 이유도 없는데 죽었고 더 살 필요도 없는데 살았다”는 후속 이미지들에서 은은하게 스며 나는 마조히즘(masochism)의 드라마를 상연하기 위한 전주곡에 가깝다.

  특히 마조히즘을 사디즘의 보완적 변형, 곧 마조히즘을 대상인 타인에게 처벌과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주체가 얻게 되는 쾌감인 사디즘에서 그 대상이 포기되고 주체 스스로를 향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내용물로 정의하는 프로이트의 관점이 아니라, 주체가 겪어 내는 고통과 처벌 이후에야 가능해지는 어떤 쾌감이자 그것의 사후적 효과로 규정하는 들뢰즈의 통찰을 따른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주체의 자아에게 되돌아온 사디즘’(지그문트 프로이트,본능과 본능의 변화」,무의식에 관하여)으로 요약되는 프로이트의 마조히즘이 아니라, ‘마조히스트는 쾌감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처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고통 그 자체는 쾌감의 원인이 아니라 쾌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일 뿐이다’(질 들뢰즈,매저키즘)등의 문장들로 표상되는 들뢰즈의 마조히즘을 통해서만, 「몽돌」의 거죽에 솟아난 죽음의 반복적 이미지들에 스민 복잡다단한 내면적 드라마와 그 미학적 뉘앙스를 섬세하게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몽돌」에 아로새겨진 죽음의 이미지들은 ‘죽음충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 스스로의 삶에 가하는 학대나 자기모멸을 통해 주체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과 정신적 존엄성을 확보하려는 들뢰즈의 마조히즘과 그 내면적 드라마가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 자명하다. 이번 시집의 마디마디에서 솟아오르는 무수한 시간성의 형상들 역시 정숙자가 간구하는 초월적 교양의 세계나 견인주의(堅忍主義)의 염결성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시인이 마조히즘의 실존적 태도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내면적 필연성의 행로를 좀 더 생생하게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또한 “무덤이 열렸다고 말할 뻔했다. 백 년 전 작품을 평자가 열고 평자가 결은 책을 독자가 열고, 장강의 물굽이가 책갈피를 타고 흐른다”(「관, 이후」), “이 나비는 역사의 쟁점의 현장의 얼룩, 미래로 달릴 궤적의 차원/이 나비는 투명하고 긴 촉수를 벋어 가루받이도 한다고 한다/그리하여 날개는 날개를 낳고 날개는 또 날개를 잇고” (일단 이것을 나비라고 부른다」),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파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는 이미 기계의 것, 파가 다듬어지는 동안―시간은 비로소 다른 차원으로 출타한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전에 시간을 벗어난 사람과 풍경과 소리들이, 혹은 지금 파밭에 파 씨 뿌리는 기계들이 혼재한다. 그리고 그 파밭은 곧 수몰될 수도, 사원이 될 수도 있다”(「순수이성과 지평―칸트 프리즈」) 같은 이미지들에 잠긴 시간성의 깊이를 찬찬히 되짚어 보라.

  저 이미지들에 돋을새김의 필치로 아로새겨진 것처럼, 시인은 매일매일 제 삶의 무수한 마디들로 주어지는 그 찰나의 ‘시간’들을 “장강의 물굽이”로 빗대어진 영원성에 비추어 보려 한다. “촌음이 아쉬우면서부터 나는 편지, 메모, 노트, 엽서, 책, 헌 종이로 만든 봉투 등에 연월일시분을 기입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 나와 함께한 그 시각을 사인해 두는 행위야말로 우정이요 사랑이며 기념비라고 찜한 까닭이다”(「실천이성에 얹힌 파니―칸트 프리즈」) 같은 문장들이 적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또한 시인이 제 삶의 매 순간 “다른 차원으로”의 “출타”를 꿈꿀 뿐더러 그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 내는 “미래로 달릴 궤적의 차원”, 좀 더 나은 삶과 보다 견고하고 충실한 교양인의 세계로 스스로를 드높이려는 노력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결국 시인은 매일매일 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촌광음(一寸光陰)의 시간들을 아끼고 어루만져, 제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싸움을 매 순간 치러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시인은 제 자신과의 치열한 분투가 무의미한 도로(徒勞)에 그치거나 유한한 생의 본질인 허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그 곤혹스런 아이러니의 맥락을 오랫동안 성찰해 온 것으로 보인다.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록은 자신이 택

하거나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

므로 왼발과 오른발에 (끊임없이) 달빛과 모래를 끼얹을

뿐이었다.

 

  우기(雨期)에조차 불/길은 지지 않았다. 혹자는 스스로,

혹자는 느긋이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고, 머나먼

비명을 읽는 자들이 뒤늦은 꽃을 바치며 대신

었다.

 

  늘 생각해야 했고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들

  피해도, 피하려 해도, 어쩌지 못한 불꽃들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

  물결치는 산맥들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에서, 이제 막 광기에 진입

한 니체들의 술잔 속에서 마침내 도달해야 할 불/길,

속에서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 속에

서.

  살아남은 니체들부분

 

 

  서두에 등장하는 “삶이란 견딤일 뿐이었다”는 이 지상의 삶에서 제 자신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분투가 허무와 무의미의 아가리로 집어삼켜질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순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수긍하지 않고서는 읊조려질 수 없는 말이다. 또한 이번 시집의 표제어이기도 한 “살아남은 니체들”이란 허무와 무의미를 제 삶의 바닥까지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생성과 창조가 선사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최대치로 만끽하려는 ‘능동적 허무주의자(active nihilist)’의 세계로 나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한다. 그렇다. 이 시편이 역설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그 대부분의 “목록은 자신이 택하거나 설정한 것”일 수 없다. 부모와 그들로 인한 삶 그 자체의 조건을 우리 스스로가 “택하거나 설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게 될 인생 전체의 행로 가운데서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목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은 이와 같은 주체의 무능력과 수동성,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경험 세계에 드리워진 허무와 무의미로 인해 삶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거나 그 의욕과 가치를 깡그리 상실해 버린 ‘수동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를 단 한순간도 넘보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 진리란 없고 사물의 절대적 성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가치가 현실에 대응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인식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종교적 진리와 전통적 도덕규범에 의해 은폐되었던 현실 세계의 거짓과 오류와 모순과 갈등을 그 자체로 긍정하고 그것이 이루어 내는 생성과 변화에 참여하면서 제 스스로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주인으로 공언하고자 한다. 곧 시인은 자신을 ‘능동적 허무주의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이며, 니체가 천명했던 ‘디오니소스의 긍정’을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그 구체적인 형상들로 다시 번안하고 있는 셈이다.

  위에 인용한 「살아남은 니체들」의 네 매듭의 연들 가운데서 두 번째에 나타난 “죽음에 주검을 납부했다”나 “묘비명을 읽는 자들” 같은 이미지들은 시인 제 자신을 비롯한 무수한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의 맥락을 고지한다. 또한 세 번째에 나타난 “결코 퇴화될 수 없는 독백들/물결치는 산맥들”이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그 가치 척도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자, 곧 무수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새로운 작업과 혁신적인 실험들을 비유한다. 동시에 이들의 불멸의 예술 작품들이 서로를 비추면서 이루어 놓는 고전의 ‘이상적 질서(ideal order)’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담는다. 결국 모든 시인과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바는 자신의 작업이 새로운 예술적 변곡점과 분기선을 창안해 내는 그 신기원의 주인공이 되려는 자리에서 움터 나기 때문이리라.

  「살아남은 니체들」의 마지막 연에서 등장하는 “강물을 거스르는 서고(書庫)”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무수한 저작들 사이에서 새로운 예술적 분기선을 만들어 내려는 시인 제 자신의 분투 어린 작업을 가리킨다. 또한 “이제 막 광기에 진입한 니체들의 술잔 속”이란 정숙자 자신을 비롯하여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의 세계를 창출하려는 무수한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연 엘리엇(T. S. Eliot)이 말한 고전 저작들의 ‘이상적 질서’를 수정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달아나도, 달아나도 쫓아오는 세상 밖 숲 속에서”라는 맨 끄트머리의 이미지에 빗대어 드러낸다.

  시집 곳곳에 들어박힌 “칸트가 될까 했더니 이미 칸트가 있다/이상이 될까 했더니 이미 이상이 있다//피 이상의 피 흘려 볼까 했더니 이미 십자가를 세우고 간 자가 있다” “더 이상의 새로움은 ‘이미’에게 포위되었다”(「굿모닝 천 년」), “소년소녀들/이제 책보다는 바다를/읽어야 한다//많은 물굽이를 넘어야 하고 돌아다보아야 한다. 물의 늪에 물린 것이다. 빠져나갈 길이란 없다. 발자국을 하늘로 옮길 때까지”(「절름발이 바다」), “나는 흰 목과 푸른 목을 준비한다/떠나온 곳으로 이어지는/출생과 삶과 최후를//표절부의 고리에 정중히 비끄러맨다”(「육식성, 시」)라는 구절들 역시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여기서 나타난 “이미”와 “책”과 “표절부” 같은 핵심 낱말들은 시집 곳곳에서 엿보이는 고전의 영향에의 불안을 가장 명징하게 표상할 뿐만 아니라, 저 ‘이상적 질서’의 수정과 변경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또렷하게 예증하기 때문이다.

 

 

  3.

  시인 정숙자의 가슴팍 깊은 곳에는 두 가지 상반된 충동과 심리적 벡터가 가로지르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를 바닥까지 들여다보면서도, 좀 더 고차원적인 앎과 삶에 순결하게 헌신하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창안하려는 능동적 허무주의자의 벡터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신’ 또는 ‘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순응주의자의 면모이다. 이 두 가지 면모들 가운데서 후자가 보다 강력한 힘을 발산하게 될 때, 정숙자의 시는 샤머니즘에 가까운 접신술의 이미지들로 둘러싸일 뿐만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의 그 모든 사물과 존재자들에게 생명과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물활론(hylozoism)과 애니미즘(animism)의 형상과 무늬들이 촘촘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액체계단」), “나 자신이 내 형틀이다/곧추 일어나 양팔 벌리면/지체 없이 열십자가 드러난다//태어나기도 이전에 벌써, 나는/내 형틀을 낳고 형틀은/형량을 끌고 형량은 삶을 몰았다”(「객담 및」) , “골목마다 다친 바람아/어깨뼈 비벼 운(泣) 곤충들아/캄캄― 적막― 속에/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숨어 있다지 않니?//우주의 중력이/십억 광년/그 텅 빈 공간에서 움튼― 움트는― 파장이라면/우리들 폐부에 뚫린 십억 광년도/힘의 원천이 되지 않겠니?//무질서가 질서인 바에야 모든 기압을 견디자구나/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숨 가쁜/돌멩이야 주사 놔 주마”(「대상 x」) 같은 이미지들을 보라.

  「액체계단」에 나타난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란 “액체계단”이란 표제어를 구체적으로 부연하는 이미지이다. 또한 이번 시집 곳곳에 스며 있는 인간의 의식과 지성이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한 구절일 것이 틀림없다. 이는 시인이 그저 ‘운명’이라고 밖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무능력과 수동성을 제 사유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객담 및」에서도 저 비감 어린 운명론은 제 형세와 모양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 자신”을 “형틀”에 비유하면서, “태어나기도 이전에 벌써, 나는/내 형틀을 낳고 형틀은/형량을 끌고 형량은 삶을 몰았다”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제 삶을 이끌고 나아가는 주체를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닌, 선험적으로 이미 점지된 어떤 ‘운명’에 의탁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대상 x」의 “골목마다 다친 바람아/어깨뼈 비벼 운(泣) 곤충들아/캄캄― 적막― 속에/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숨어 있다지 않니?” 또는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숨 가쁜/돌멩이야 주사 놔 주마” 같은 이미지들은 이번 시집에서 종종 나타나는 물활론적 사유와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명징하게 표상한다. 이렇듯 정숙자의 시에서는 “바람”과 “곤충들”과 “돌멩이” 같은 사물들을 마치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육신처럼 바라보려는 의인화의 시선과 사유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시선과 사유 역시 나날의 경험 세계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생의 여러 모순과 한계와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그녀의 간곡한 열망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아니, 시인은 제 자신을 현대적 일상의 평면성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실재할 우주 만물이 더불어 교호하고 화육하는 영원성의 세계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정숙자의 시는 “인간을 통해 갖가지 의지를 표출하는 신./그는 정작 지상에 태어나지 못한 인간이다”(「균열」), “어떤 나비의 날개에는 이토록 난해한 무늬도 암호화되어/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거미와 얼굴의 관계에서 왜 손이 끼어들었는지 천착하다가 나는 그만 그것을 운명이라고 결론짓고 말았다”(「일단 이것을 나비라고 부른다」) 등으로 축약되는 종교에 가까운 우주론적 아날로지(analogy)를 제 중심축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시인이 지상의 불투명한 삶을 “넓게 깊게 높이 또한 쓸쓸히”(「만들어진 침묵」)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리라. 나아가 “우리의 4차선 도로 위에는 날개 달린 사슴이 뛰어든다. 그러나 이미 그 사슴은 사슴이 아니다. 악마와 대면한다. 또, 또, 또 말려들 수밖에 없다”(「제2국면」)는 구절들로 축약되는 우발성의 폭력을 넘어서, “번개가 때려도 비관/원망/반격하는 법 없다 합니다”(「지성인」), “조용히 들여다보면 내 안에도 푸른 문 하나는 있어. 그 창을 열고 밝은 데로 너른 길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쓰다듬는다”(「슬픔은 울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같은 이미지들로 표상되는 초월적 “지성인”의 에토스를 제 자신에게 강요하는 자리에서 기원하는 것이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때론 꽃이거나 바위이거나 살쾡이이거나 달…빛…이지만/어떤 시간도 나를 향해 출발한 이상 무를 수 없지/시간에게 되돌림이란 ‘절대 불가’ 아닌가/비켜서 볼까 애쓴들 그 애씀마저도/천 년 전에 출발한 현재일 따름”(「시간의 충돌」), “내가 놓고 간 인생을 자식이 살고, 자식이 놓고 간 인생을 또 그의 자식이 (치밀히) 살아 내야 할 것이리라. 그리하여 무수한 전생을 쌓아 올린 다음에라야 참담한 잿빛은 밝고 단단하고 온화한 뼈로 진화하리라” (「판단력 펌핑(pumping)―칸트 프리즈」), “한 점 핏방울이던 때부터 내 심장과 내 눈과 나를 둘러싼 현상들을 찍고 간 현재들 그들이 셀 수 없는 차원으로 날아갔구나. 우주 구석구석 어디서든 나를 돕고 있(었)구나. 깊고 맑은 아침저녁은 그들이 보낸 것이었구나. 그리고 어떤 현재는 다시 돌아와 오늘의 내 심장과 내 눈과 나를 둘러싼 현상들을 확인하고 또 떠나고 떠나 끊임없이 돕고 있구나”(「현재의 행방」) 같은 윤회(輪廻)의 이미지들 역시 같은 테두리를 이룬다. 시인은 매 순간 주어지는 “현재”를 “천 년”으로 표상되는 무한한 시간들로 확장시켜 우주적 연속성의 차원에서 사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광대무변한 우주론의 차원에서 제 삶을 매번 성찰하여 그 마디마디를 이루는 무수한 “현재”들을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살아 내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싯다르타」나 「무릎_學」에서 엿보이는 불교적 사유와 이미지들은 실상 그 종교적 교리를 그대로 옮긴 것일 수 없다. 이들 역시 시인 제 자신의 실존을 보다 숭고하고 존엄한 것으로 드높이려는 열망에서 온다. 이제까지 말해 온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메모의 습관, 나아가 독서광의 면모나 접신술과 물활론으로 표상되는 우주적 아날로지의 사유 역시 태생적인 것이라고밖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존재론적 허기를 채우려는 시인의 원초적 열망에서 온다. 그것이 시 쓰기와 인문학적 교양의 상아탑으로 점철된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리라. 그러나 이로 인해 정숙자의 많은 시편들이 메타시의 면모를 띠게 될 뿐만 아니라, 미학적 자기 노출을 라이트모티프로 삼는 현대 미학의 첨예한 방법론을 겨냥하게 된다는 사실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시편들의 모서리에 숨겨져 있다. 이들을 우리 눈앞으로 데려와 보자.

  가령 “어어행 성심/어어행 성의/긴긴 그늘과 오늘/엄지발가락을 지켜 간다네/그리고, 그리고 팔은 많으나 기둥은 하나/팔은 많으나 기둥은 하나. 울혈서껀 울증서껀 영영/품어 버리고 빨긋|파릇|큐브를 맞춰 간다네”(「활엽수의 뇌」), “그늘을 지우는 꽃(을/신들이 켜 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꽃 속의 너트」), “내 좌측 뼈들을 찰나에 타이드크랙화함으로써/오른쪽 팔다리가 왼쪽 팔다리를 대행/수행케 함으로써/대칭은 예비이며 구원이라고/대자연에 낭비란 없느니라,고/(신의) 창조와 (인간의) 창작은 다른 거라고/눈만이 눈을 귀만이 귀를 맞잡을 수 있느니라,고/하나의 하나를 위한 또 하나의 배치였다고”(「스페어(spare)」) 같은 구절들을 보라. 또한 이들에서 등장하는 상호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매우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병치되고 결합되는 장면들을 천착해 보라.

  이들은 ‘담론 안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나타나는 배치로써, 하나의 목소리 안에 있는 모든 목소리를, 카를루스의 독백에서 젊은 여자들의 광채를, 언어 안에서 언어를, 말 안에서 명령어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의 고원』)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과 더불어, 이질적인 이미지나 에피소드들을 불현듯 출현시키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병치시키는 콜라주(collage)의 방법론을 시인이 의도적인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후처럼 보인다. 특히「활엽수의 뇌」에 나타난 『한국만가집』이란 책의 서지 사항들은 이 시편이 미학적 자기 노출을 제 시 쓰기의 원천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 근래 들어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실험적인 현대시로 그 미학적 중심을 이동시키고 있다는 유추를 가능케 한다. 또한 인용 시편들에서 활용된 “큐브”와 “상엿소리”, “꽃”과 “너트”, “타이드크랙화”와 “대자연” 등과 같은 이질적인 오브제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콜라주 기법의 도입 역시, 정숙자의 시가 원초적 차원에서 이루어 왔던 우주적 아날로지의 세계와 더불어 자유간접화법으로 표상되는 현대 미학의 비유기적 파편성의 세계를 동시에 공존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4.

  나눠 가진 분홍들

  낯선 작살로 돌아오는 밤

  내일은 무기상에 들러

  탱크 한 대 사 와야겠다

                               밀어 버려야겠다

 

 극한상황에서도 심고 가꿨던

 분홍 분홍 분홍 분홍            아으  

 

      *   *

 

  (그리고 열 시간 후, 느릿느릿 산책하며 책을 읽는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백

석, 「허준」.)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영혼의 승화를 위한 ‘나들

이’이며, 만일 그렇게 승화된 ‘넋’ 하나를 얻게 된다면 그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신범순,

노래의 상상계,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 p.800.)

 

  블랙홀 근처에 버린 분홍들

  머뭇머뭇 되돌아온다

     아으    탱크 구입, 유보

  독서는 : 독이다

   ―「역광」 부분

 

 

                      누 떼여, 부디

               강을 건너지 마오. 누 떼는

  그예 강을 건너시네. 이 일을 어찌 할꼬, 어찌 할꼬

 

  누여, 누 떼여! 수천 년 걸리면 어떻습니까. 당신의 다

음, 당신들의 다음다음다음 세대 또한 당신인걸요. 준비

없이 강물에 뛰어드는 건 멋있습니다. 그러나 급류가, 포

식자가, 절벽이 기다립니다. 핸드백을 만드십시오. 늦지

않았습니다. 성운이 바뀐 어느 날, 당신들의 핸드백을 제

딸이 사겠습니다.

      ―누 떼의 도강이 그리 처절한 것은

  그들에게 핸드백이 없기 때문이다부분

  

 

  「역광」에 나타난 “(그리고 열 시간 후, 느릿느릿 산책하며 책을 읽는다)//“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백석, 「허준」.)/“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영혼의 승화를 위한 ‘나들이’이며, 만일 그렇게 승화된 ‘넋’ 하나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신범순, 『노래의 상상계』,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 p.800.)” 같은 구절들이나, 「누 떼의 도강이 그리 처절한 것은 그들에게 핸드백이 없기 때문이다」에 차용된 「공무도하가」는 정숙자의 시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창안했던 콜라주 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일러 준다. 또한 시인의 성실한 독서 내력에서 기인한 미학적 실험 정신과 자기 혁신을 가늠케 해 준다.

  서정주가 일구어 놓은 물활론과 애니미즘과 접신술의 세계, 아니 우주론적 아날로지로 표상되는 전통 서정시의 예술적 짜임 관계에서 시의 마력과 정수를 원초적으로 체험했던 시인에게 저 콜라주와 자유간접화법으로 표상되는 현대 미학의 첨단점은 지극히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또한 시인 정숙자가 제 실존 전체를 걸고 수행할 수밖에 없었을 온몸의 이행이자 목숨을 건 도약이었을 것으로 거듭 추론된다. 시인이 이렇듯 제 언어의 몸과 이미지의 짜임 관계 전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뒤바꿀 수 있었던 잠재력 역시 나날의 삶에서 주어지는 무수한 “현재”의 시간들을 독서와 메모에 전념하면서 제 스스로를 충실하게 성찰해 온 그 실존의 역사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 새겨진 “시간”과 “책”에 대한 문양들은 감동을 넘어서 어떤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나아가 “신만이 시간에/구애받지 않는다”는 앞머리의 이미지는 범상한 사람들의 세계를 초월하려는 시인의 간절한 열망을 아프게 증언한다. 그것은 “일초 일순/촉박할/수밖에 없는 나는 산책로에서 간신히/책을 읽다가 아하 내가 책갈피였구나”라는 참담한 자기고백에서 기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에.

 

 

  신만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초 일순

  촉박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산책로에서 간신히

  책을 읽다가 아하 내가 책갈피였구나

 

  그렇다면 이 방대한 생존의 실록에서

  길 좌우 쪽 녹슬지 않게 좀먹지 않게

    -「노력을 소비할 것」부분 

 

 

  ###------------ 재수록  

  *『문파 MUNPA』 2018-봄호 <시집 깊이 읽기>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 수료,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정읍사의 달밤처럼』등, 산문집 『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 이찬/ 문학평론가, 2007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시적 에피파니를 위하여-이장욱론」당선,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