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2017-06-16 (금) 034면
[오후 한 詩]/ 채상우(시인)
꽃 속의 너트
정숙자
꽃 속에 너트가 있다(면
혹자는 못 믿을지도 몰라, 하지만 꽃 속엔 분명 너트
가 있지. 그것도 아주아주 섬세하고 뜨겁고 총명한 너트
가 말이야.)
난 평생토록 꽃 속의 너트를 봐 왔어(라고 말하면
혹자는 내 뇌를 의심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꽃 속엔 분명 너트가 있어. 혹자는 혹 반박할까? '증
거를 대봐, 어서 대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볼 수 있담.)
꽃 속에 너트가 없다면 아예 꽃 자체가 없었을 것(이야!
힘껏 되받을 수밖에. 암튼 꽃 속엔 꽉꽉 조일 수 있는 너
트가 파인 게 사실이야. 더더구나 너트는 알맞게 느긋이
또는 팍팍 풀 수도 있다니까.)
꽃봉오릴 봐 봐(요.
한 잎 한 잎 얼마나 단단히 조였는지. 햇살 한 올, 빗방
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
의 애환까지도 다 모은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
지.)
꽃 속의 너트를 본 이후(부터
'꽃이 피다'는 '꽃이 피-였다'예요. 어둠과 추위, 폭염과
물것 속에서도 정점을 빚어낸 탄력. 붉고 희고 노랗고 파
란… 피의 승화를 꽃이라 해요. '꽃이 피다' 그렇죠. 그래
요. 그렇습니다.)
그늘을 지우는 꽃(을
신들이 켜놓은 등불이라 부를까요? 꽃이 없다면 대낮
일지라도 사뭇 침침할 겁니다. 바로 지금 한 송이 너트 안
에 한 줄기 바람이 끼어드는군요. 아~ 얏~ 파도치는 황홀
이 어제 없던 태양을 예인합니다.)
-전문-
■ 꽃 속에 너트가 있다고? 정말? 재미있는 상상력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당장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증거를 대 봐, 어서 대 보라고!" "거참 딱하구나. 그 묘한 걸 어떻게 대 볼 수 있담." 그는 아마 평생토록 모를 것이다. 꽃 속의 너트가 "햇살 한 올, 빗방울 하나, 바람 한 줄기, 먼 천둥소리와 구름의 이동, 별들의 애환까지도 다 모"아 꽃잎 "한 잎 한 잎"을 "얼마나 단단히 조"여 꽃봉오리를 맺었는지. "그리고 어느 날 은밀히 풀"어 꽃을 피우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한다. 이 시의 상상력은 그저 재기에서 문득 출현한 게 아니라 "평생토록" 꽃 한 송이가 필 때까지 무릎 꿇고 그 앞을 지킨 자의 무궁한 기도에서 발원한 것이라고.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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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경제/ 2017년 6월 16일 (금) 034면[오후 한 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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