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22
정숙자
반투명의 시간// 천지에 널린 자유를 너에게도 좀 나눠주고 싶구나. 너
는 잘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 우리 친정엔 ‘토담-밭’이라는 게 있었단다.
멧갓의 끝자락에 있었지만 대문만 열면 몇 걸음에 오갈 수 있는 곳이었지.
그러니까 자그마한 남새밭이었어. 파, 마늘, 부추, 호박, 시금치 등 얼른
솎아다가 양념이나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생장고(生藏庫)였지.
거기 움튼 잎사귀들은 정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자랐단다. 밤에는 별이
깔리고 은하수를 질러 이슬과 아침이 오고는 했다. 나비, 잠자리, 풍뎅이,
풀무치, 여치, 땅강아지뿐 아니라 종달새도 높이 뜨고 바람과 구름은 또
얼마나 깨끗했겠니! 비닐? 없었지 물론! 비닐하우스라는 것도, 지금 막 너
에게서 벗겨낸 '못된코르셋' 같은 건 아예 상상도 못했고말고.
네가 아무리 무골호박(無骨南瓜)이라지만 속마음이야 어찌 분노치 않을
수 있었겠느냐. 볼 때마다 가엽고 사올 때마다 미안하다. 덩굴 틈새 통꽃
이 지자마자 일정규격의 봉지를 들씌웠음이 분명하다. 클 만큼 클 수도 없
고, 멋대로 휘어볼 수도 없고 길쭉길쭉 사람이 정한 길이와 모양대로만 발
뻗었겠지. 꼼짝달싹은 고사하고 숨 한번 제대로 쉬었겠느냐.
여기서 ‘호박’은 빼고 ‘애’라고만 부르자꾸나. 아니, 아니다. ‘아이’로 풀기
로 하자. 뭐? 그것도 아니라고? 그래, 그래. 그렇게 하자. ‘얘야’, ‘얘야’ 너
에게도 필시 야성(野性)이 있을 것인데 잠시라도 마음껏 물 마시고 팔다리
도 내두르거라. 내 비록 잠시 뒤에 너를 썰고 볶을지라도 아직은 네 행복을
돕고 싶구나. 그 옥죄는 비닐만 보면 나조차 숨이 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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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경계』 2017. 봄호 /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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