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탁자
정숙자
아직, 또 다른 지구는 없다고 한다
발 닿는 곳마다 경쟁이 붙고
심장 근처엔 비극이 산다
약육강식,
가차 없는 질서
그런데도 우리는 이 구석을 ‘아름답다’ 덮는다
멀리서 보면 푸른빛이라 한다
약육강식은 그렇다 치고, 강육약식强肉弱食도 엄연히
존재하는 비탈을 우리는 먹어야 한다. 지금 움직이는 우리
모두는 아예 태어나지 못했거나 앞서 사라진 자보다 훨씬
강했다는 검증이지만, 어느 누구도 고통이 멎지 않는다.
썩은 것은 썩어서 썩고, 안 썩은 건 안 썩어서 썩는다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희소식인가. 거
기 토끼가 있었다면 나는 달이 떠오를 때마다 걱정했을
것이다. 토끼가 저녁은 때웠는지, 낮 동안 친구들과 사이
좋게 뛰놀았는지, 수토끼와 암토끼가 갈등을 겪고 있지
나 않은지,
풀은 넉넉한지
춥지는 않은지
이슬들은 깨끗한지
천적이 노리는 건 아닌지
빨간 눈동자가 검어지지는 않았는지
뿔 달린 돌연변이가 나오지는 않았는지
똥 천지가 되어 흰 털이 개털이 되지는 않았는지
생명이란, 생활이란 이 모든 섬유를 거느리는 게 아닌가
생각의 극장에서는 어떤 초기화도 어렵지 않다
-『시에티카』 2017-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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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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