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20
정숙자
나는 다른 별에 왔다// 이 별에 오기까지 많은 멀어짐이 있었다. 부모 형
제, 옛 친구, 선한 이웃, 예쁜 옷, 저자거리, 향기로 가득 찬 백화점…, 다 주
워섬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즐거움을 덜어냈다. 매우 복잡한 입체도형이
랄까. 단숨에 그릴 수 없는 왜곡과 기하학적 침묵을 수렴한 우주선, 스스로
만들어 어렵사리 탑승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이름도 번호로도 명명되지 않은 신생별이다. 어떤 천
문학자의 망원경에도 잡히지 않은 작고 푸른 별. 한 생명이 일생을 바쳐 당
도한 투명구(透明球)라 하면 과장일까? 이곳엔 잘 웃는 소녀 하나와 현판
없는 도서관 하나가 있다. 서고에 꽂힌 한권 한권의 책은 촌각을 영원케 하
는 지어지선이자 여명이다.
지구의 어느 나라에서는 통(桶)을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다 읽은 셈 되어
그것이 곧 기도를 대신하고 복을 받는다고도 한다. 참 신기한 발명이지만
이 별에서는 그런 쾌속이 통하지 않는다. 많은 책들을 돌아가는 책꽂이에
배열하고 쓱쓱 돌려 현자의 사상을 흡수할 수는 없다. 지문이 아프리만지
검지를 세워 한장 한장 넘긴다.
책은 미터법으로 표기할 수 없는 공간이며 독서는 별종의 수혈이다. 나의
남은 인생은 이러히 요양할 요량이다. 다섯 그루 버드나무는 없지만 잘 웃
는 소녀 하나와 현판 없는 도서관 하나가 있으니 더 바랄 것이라곤 해질녘
의 서늘한 미풍이랄까. 가끔 후박나무에서 짓떠드는 새소리까지 담아내는
창틀이 오늘 따라 조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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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2016-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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