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프로젝트 - 18
정숙자
프리건//프리건(freegan)은 free와 vagan(채식주의자)의 합성어. 검색하면 몇몇 정보를 볼 수 있는데, 이 용어는 나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다. 쓰레기의 최소화, 사물의 재활용, 검소한 일상 등에서 다소의 근접성을 가진다. “오염을 줄이고 생태 환경을 보호하려는 철학적 사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공감이 간다.
1
30여 년, 내 부엌에서 휘파람 불어가며 커피 물을 데워준 주전자가 나이를 어쩌지 못하고 새기 시작했다. 하늘에 들어 올렸더니 바늘구멍만한 햇살이 바닥을 뚫고 있었다. 첫날부터 군말 없이 제 몫을 다한 그를 선뜻 버린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 어찌해야 그를 살릴 수 있을까 며칠을 두고 망설이고 궁리하다가,
2
별 수 없지. 요즘은 땜장이도 찾을 수 없으니 버릴밖에! 가엾은 주전자를 들고 현관문을 열려는 찰나 ‘최선을 다 해봤어?’ 어디선가 울림이 왔다. 머리로써만이 아니라 직접 손쓰기에 돌입했다. 은박지로 막아보고-실패, 못을 디밀어보고-실패, 연장통을 뒤적여 이런저런 방법을 써보는 사이 너덧 시간이 흘렀다.
3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란 답답증을 팽배시킨다. 마지막 방법으로, 언젠가 담아두었던 볼트와 너트를 끼워 맞추다가 급기야 큰 소리로 주전자를 타박하기에 이르렀다. “야, 너도 애를 좀 써봐라. 너를 살리려고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데 네가 가만있으면 어떡해!” 그리고는 몰린 힘을 다 쏟아 스패너를 조였다.
5
‘이번에도 안 되면 끝이야, 주전자도 이해할 거야’ 심판관인 수돗물을 채우고, 한 손으로 쳐들고 바라보다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초조히 지켜봤다. 물방울이 맺히다가 지직거리다가 똑 똑 떨어지기를…. 그런데!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눈곱만큼도 새지 않을 뿐더러 휘파람소리까지 내지르는 게 아닌가.
6
주전자가 귀가 없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주전자가 심정이 없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주전자가 의리가 없다고 어떻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주전자는 나에게 붕우유신의 품위와 행복을 안겨주었다. '내 나이도 이제 첫눈 무렵 어슬녘이 아니냐. 부디 또다시 새지 말고 마지막까지 함께 숨 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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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사』2016.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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