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충돌
정숙자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이 있다
천 년 전에 출발한
그 시간은
무수한 시간과 시간 사이를 뚫고 이곳에 왔다
내 곁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천 년 전에 출발한 시
간일 거야
천 년 전 그 시간은 내가 빚었을 수도,
다른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몰라
희한한 맛과 모양과 명암이 내재된 시간 ; 시간들
때론 꽃이거나 바위이거나 살쾡이이거나 달…빛…이지만
어떤 시간도 나를 향해 출발한 이상 무를 수 없지
시간에게 되돌림이란 ‘절대 불가’ 아닌가
비켜서 볼까 애쓴들 그 애씀마저도
천 년 전에 출발한 현재일 따름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두 면이 즉사했
다…는, 그 어처구니를 설명할 길이란 부재. 우연이라고
밀어붙여도 석연치 않다.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과 시간
이 된통 엉킨 거라고 밖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가보다
천 년을 달려온 속도와 방향이라면
휠 틈도 꺾을 수도 없는 거겠지
감각을 넘어선 그 시간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의 신체 아닐까?
가령 어느 날 내가 죽었다 해도
나를 통과한 시간만큼은 더 멀리 가고 있을 거야
지구를 벗어난 어딘가로, 수수 광년 밖으로
거기 또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지
-『시사사』2016.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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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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