휨 현상
정숙자
침대에서 일으킨 발자국
거실로 이어진 아침
가로 놓인 테이블, 찻주전자, 펜랙(penrack)…
한 치도 변한 게 없다
쓰다 만 노트, 리모컨, 시계…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시간은, 다만, 밤사이
아침은 항상 그만큼의 선도로 새하얗다
어떤 아침을 막론하고
간밤에 펼쳐놓은 종이 한 장
그대로,
누군가 터치하기 전에는
어느 외계에서 덩굴손 뻗쳐오기 전에는
유리창의 순수 앞지르기 전에는
절대 신뢰의 백지 한 장
그런데 그 종이가 북- 찢어져 있는 걸
멀쩡한 의식으로 본 적이 있다
쓰다만 원고, 의자, 실내화, 세절기…
모두 젖어 있었다
심지어 튼튼한 책상의 무르팍까지
아니, 그 다리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두 쪽이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내려가고 있었다
*『예술가』2015-겨울호 <예술가 신작시>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