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휨 현상

검지 정숙자 2015. 12. 8. 19:08

   

 

     휨 현상

 

    정숙자

 

 

   침대에서 일으킨 발자국

   거실로 이어진 아침

   가로 놓인 테이블, 찻주전자, 펜랙(penrack)…

   한 치도 변한 게 없다

 

   쓰다 만 노트, 리모컨, 시계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시간은, 다만, 밤사이

 

   아침은 항상 그만큼의 선도로 새하얗다

   어떤 아침을 막론하고

   간밤에 펼쳐놓은 종이 한 장

   그대로,

 

   누군가 터치하기 전에는

   어느 외계에서 덩굴손 뻗쳐오기 전에는

   유리창의 순수 앞지르기 전에는

   절대 신뢰의 백지 한 장

 

   그런데 그 종이가 북- 찢어져 있는 걸

   멀쩡한 의식으로 본 적이 있다

   쓰다만 원고, 의자, 실내화, 세절기

   모두 젖어 있었다

 

   심지어 튼튼한 책상의 무르팍까지

   아니, 그 다리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두 쪽이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내려가고 있었다

 

 

   *『예술가』2015-겨울호 <예술가 신작시>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그룹명 > 나의 근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측면의 빛  (0) 2016.02.23
허무를 보았으므로  (0) 2015.12.30
이슬 프로젝트-10  (0) 2015.10.13
투명가방  (0) 2015.09.28
협시 4  (0) 201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