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시학(作詩學)
정숙자
상상력 꼽치는 데 왕도는 없다 봉투 만든다
‘헌 종이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 죄 아니다 봉투 만든다
부쳐온 책 봉투는 다시 책 봉투
각양각색 이면지/파지로는 A4용지
넘어간 달력으로는 네 귀의 합 360°짜리
편지 담을 봉투 만든다
칼 풀 자 판지, 이들은 또 한 벌의 내 문방사우
뒤집고 붙이고 반듯반듯 잘라 봉투 만든다
글쓴다 애쓴다 마당쓴다 모자쓴다 돈쓴다 휩쓴다 이 많은
쓴다 뒤에서 만들어 쓴다가 제일 맑다
읽어도 읽어도 다 못 읽을 책, 지어도 지어도 다 못 지을 시
바람에게 맡기고 봉투 만든다 없는 시간 뚝 떼어 봉투 만든
다
봉투 하나 만들면 봉투 하나만큼의 성취
편지 한 통 부치면 편지 한 통만큼의 소통
이런 공기가 곧 시다 봉투 만든다
따뜻한 공기의 입자들에게 국으로 배운다 봉투 만든다
상상력에 왕도는 없다 네 귀의 합 360°짜리
햇빛 담을 봉투 만든다
-『문학나무』2007년 가을호
---------------------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음표/ 정숙자 (0) | 2013.10.02 |
---|---|
버리기 위한 집/ 정숙자 (0) | 2013.10.01 |
나의 작시창(作詩窓)/ 정숙자 (0) | 2013.09.26 |
모래의 각(角)/ 정숙자 (0) | 2013.09.25 |
고백록/ 정숙자 (0) | 2013.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