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정숙자
센 시간을 꼬박꼬박 입금한다
두둑이 쌓인다 다시 꺼내어 쓸 수 없지만 년 월 일 시 분
까지 기록한다
편지의 말미, 읽은 책의 끝, 노트 정리한 날, 초고와 탈
고 일자, 핸드메이드 엽서의 한쪽 귀퉁이, 몇 음보의 메모
끝에도
기록, 기록, 기록…… 이것은 쫓기는 자의 발자국
숨 돌릴 틈 없는 자의 눈초리
왜 쫓기는가?
웬 놈이 따라 붙기에 매 순간 긴장하는가?
기록, 기록, 기록…… 기러기 떼 날아간다
쫓기지 않던 날의 시간 속으로 저들 기러기 따라 끝없이
돌아간다
어머니 몸에 닿기도 이전, 더 먼 곳에 이르러
내가 누구였는가 무슨 죄과이기에 지금껏 쫓기는가 언제
풀릴 것인가 등불을 높이 쳐들고 살피는 순간
훔치는 자가 보였다
수많은 것 중에서 그가 추켜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힘껏 달아나 울며불며 여기 태어났던 것
모든 시간을 온전히 반납할 때까지 그는 마땅히 시간에 쫓
겨야 했던 것이다
범인은, 죄를 시인하는 때부터 비로소 죄인이 된다
편지의 말미, 읽은 책의 끝, 노트 정리한 날, 초고와 탈
고 일자, 핸드메이드 엽서의 한쪽 귀퉁이, 몇 음보의 메모
끝에도
시간에 쫓기는 자의 참회와 형벌이 이어진다
-『정신과표현』2008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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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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