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수집했다
정숙자
거실 바닥에 신도시가 생겨났다
나날이 빌딩 숲 높아간다
한 달 한 달 징검다리살림 꾸리는 터에 도시를 세우다니!
그거…… 참
부자 되었다는 거 부자 된다는 거
쉽지 않은 일이었지
갈수록 집은 좁아지고, 굴절되는 햇빛 아래 형형색색 책
들은 자고, 펼쳐 볼 겨를은 없고 구석구석 채우다 못해 되는
대로 쌓았더니만
손바닥 공원과 길은 좀 남았지만
낡은 외짝 소파에 앉아 내려다보는 기분이란…… 그리 나
쁘지 않았다
거인국의 왕이 됐거든
볼때기를 꼬집어 봤지 꿈이 아니더라고 글쎄
천천히 빌딩 사이를 거닐려는데
도시가 두세 걸음에 끝나버리는 거야
됐다, 이젠 됐다 싶더라고
거인의 보폭이란 이런 거였구나
평생토록 글눈에 머리를 들이민 결과로구나
난, 진짜로 신도시 건설주가 되었더라도 이렇게 즐겁진
않았을 거야
책 더미에 파묻혔다는 거
그거…… 참
내가 선택한 삶이었거든
막 눈물이 나더라고, 뭐랄까 집이 좁아서라 아니라
내가 거인이 되었다는 게
-『문예연구』2009년 봄호
----------------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래의 각(角)/ 정숙자 (0) | 2013.09.25 |
---|---|
고백록/ 정숙자 (0) | 2013.09.24 |
정신승리법/ 정숙자 (0) | 2013.09.21 |
흘림체가 흐르는 공간/ 정숙자 (0) | 2013.09.19 |
죽음의 곡선/ 정숙자 (0) | 2013.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