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정신승리법/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9. 21. 20:00

 

 

        정신승리법* 

 

      정숙자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거야

   그림자는 밟힘의 힘으로 사는 거고

   어둠을 봐

   그림자가 없잖아

   걷는다는 것은 밟는다는 것이고 밟는다는 것은 나아간다

는 것이고 밟힌다는 것은 한순간 누군가의 대지가 되어준다

는 뜻이야

   그렇지만 그 누구라도 맨 먼저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거야

   맨 나중에도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자신의 그림자 위로 자

신의 그림자와 함께 쓰러질 거야

   그러니까 그림자는 힘, 기댈 곳이야

   어떤 이가 너를 밟고 지나간다면 그 순간 너는 그에게 힘

이 되어주는 거지

   너는 그를 자라게 할 거야

   또 다른 이는 그를 밟고 지나갈 거고

   모두들 그렇게 진화해 왔을 거야

   조물주는 먼저 물을 흐르게 하거나 식물의 싹을 틔운 게 아

니라 태양 속에 그림자부터 심으셨던 거야

   태양조차도 그림자가 없으면 안 되었던 거지

   너는 너 자신의 그림자야

   그림자는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는 다시 그림자를 온

전케 하고

 

  * 건달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세상으로부터 모멸을 당하면서도 속으로

는 자신이 승리자라고 여기며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주인공 ‘아큐’에서 비롯

된 용어(루쉰,『아큐정전』)

   -『시현실』2006년 가을호 집중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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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