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흘림체가 흐르는 공간/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9. 19. 01:10

 

 

      흘림체가 흐르는 공간

                                             

       정숙자

 

 

   지문이 그득하다

   껍질 거슬러 살 속, 깡치 속, 씨앗 속까지 스몄으리니

   과일을 깨문다는 건 켜켜의 지문 허무는 일

   어찌 쌓은 공력일까

   농부 이전에 나무는 벌써

   흙의 태양의 바람의 비의…… 새들의 노래와 구름……

슬과 전설의 지문까지도 온몸에 새겼으리니

 

   긴장감이 수직(垂直)이다

   쟁반 위 칼날 모를 리 없다

   신의 침묵 간직한 사과 씨 아니던가

   막능당(莫能當)의 인간 차후 동작을 모를 리 없다

 

   사과 氏는 뇌가 있으니

   칼등에 힘을 실어 단박에 탁! 기절시킨다

   이만한 우정 없이 어찌 깎을 수 있단 말이냐

   돌~ 돌~ 향내가 풀려 나온다

 

   단물이 늑골로 넘어간다

   동글동글 골라 담아준 상인의 지문도 출렁

   막판에 닿은 내 손자국이야 식탐에 휘둘렸을 뿐

   나잇값 치르는 주름살 또한 과부하 된 지문의 누출일 거다

   한 겹 피하 조직은 턱없이 비좁은 헛간이리니

 

   사과 氏 순식에 날아간다

   모으고 익힌 생애 사각사각 건네어 주고

   흙으로 태양으로 바람으로 비로…… 새들의 노래와 구

…… 이슬과 전설이 깃든 최초의 나라를 향해

   유리창도 전격 하늘로 이동

   눈부신 전지(全紙)를 편다

   주렁주렁 사과나무가 비백서(飛白書)*로 뿌리 내린다 

 

   * 서예에서 글자의 획에 희끗희끗 빈 자국이 스쳐 날렵하게 보이도록 쓰는 서체    

   -『시작』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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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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