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체가 흐르는 공간
정숙자
지문이 그득하다
껍질 거슬러 살 속, 깡치 속, 씨앗 속까지 스몄으리니
과일을 깨문다는 건 켜켜의 지문 허무는 일
어찌 쌓은 공력일까
농부 이전에 나무는 벌써
흙의 태양의 바람의 비의…… 새들의 노래와 구름…… 이
슬과 전설의 지문까지도 온몸에 새겼으리니
긴장감이 수직(垂直)이다
쟁반 위 칼날 모를 리 없다
신의 침묵 간직한 사과 씨 아니던가
막능당(莫能當)의 인간 차후 동작을 모를 리 없다
사과 氏는 뇌가 있으니
칼등에 힘을 실어 단박에 탁! 기절시킨다
이만한 우정 없이 어찌 깎을 수 있단 말이냐
돌~ 돌~ 향내가 풀려 나온다
단물이 늑골로 넘어간다
동글동글 골라 담아준 상인의 지문도 출렁
막판에 닿은 내 손자국이야 식탐에 휘둘렸을 뿐
나잇값 치르는 주름살 또한 과부하 된 지문의 누출일 거다
한 겹 피하 조직은 턱없이 비좁은 헛간이리니
사과 氏 순식에 날아간다
모으고 익힌 생애 사각사각 건네어 주고
흙으로 태양으로 바람으로 비로…… 새들의 노래와 구
름…… 이슬과 전설이 깃든 최초의 나라를 향해
유리창도 전격 하늘로 이동
눈부신 전지(全紙)를 편다
주렁주렁 사과나무가 비백서(飛白書)*로 뿌리 내린다
* 서예에서 글자의 획에 희끗희끗 빈 자국이 스쳐 날렵하게 보이도록 쓰는 서체
-『시작』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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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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