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정숙자
녀석을 곰보로 만들었다
흔히 자근자근 깨물었다
총 총 총 잇자국 총 총 총 총 박히곤 했다
4B연필 또는 ‘스테들러(STAEDTLER)’ 펜슬
밑줄 치려면 찾아야 했다. 베개 밑에 끼워두지만 돌아
누워 페이지 넘기는 사이 감쪽같이 숨어버리므로. 읽던 책
가슴에 엎어 놓고 더듬거리며 ‘번번이, 장난치지 마 번번
이……’ 녀석을 찾는데 소요되는 몇 초와 정신 에너지, 문장
의 맥이 끊기는 게 여간 아까운 게 아니었다. ∴ 호랑이가 새
끼를 옮길 때 쓰는 방법을 도입했다. 호랑이는 제 새끼 목덜
미에 단 한 번도 잇자국을 내지 않는다. 애지중지 물어 나른
다. 천하에 고마운 <연필=그 어린 호랑이>를 나는 왜 곰보
로 만들었을까. 잠들기 전과 눈뜨는 아침, 침상에서의 독서
타임엔 나도 이제 이빨 아닌 입술로 연필을 문다.
녀석, 절대로 숨지 못한다
나, 절대로 깨물지 않는다
원실돈오! 입이란 먹고 말하고 키스할 때만 사용하는 도구
가 아니었음을……
4B연필 또는 ‘스테들러(STAEDTLER)’ 펜슬
호랑이와 나 그리고 책들
친숙히 늙어가는 지금은~ 아직도~전전긍긍 산행 중
-『시에』200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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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뿌리 깊은 달』에서/ 2013. 2. 28.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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