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삶의 작은 빛으로 세상의 시를 읽다
신 범 순
1. 우리의 삶이 시인 것을……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세계의 황홀한 빛을 건져 올리는 언어의 마술사일까? 인생의 깊은 샘물을 우리의 가슴 속에 적셔주는 존재일까? 역사의 물굽이에서 끓어오르는 외침들과 함께하는 자일까? 세상에는 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를 거닐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풍경을 갖고 있을 그 시인의 천상세계가 무엇인지 기대하며 시를 읽는다. 그 중에 어떤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시인들은 이제 그러한 천상세계를 비웃으며 시시껍절한 일상이나 사소한 이야기꺼리 또는 더 껄렁한 언어들과 놀아나기를 좋아한다. 고상한 포즈를 버리고 일부러 쌍스러운 몸짓과 추잡한 언어까지도 보란듯이 쓰는 시인들이 있다. 일상의 가장 비천한 것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들과 어울려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주목받고 인기를 얻으면 유행처럼 번지기 마련이고, 숱한 아류들이 생긴다. 수많은 시집들을 대하다 보면 시적 감동이나 시적 실험, 진지한 고뇌, 인생에 대한 관조나 눈부신 통찰 같은 많은 것들이 우스꽝스러워진다. 또한 심각한 모든 것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풍자적 시인들의 포즈조차도, 언어놀이를 통해 모든 것을 해체하며 자신의 정체성마저 희미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 실험조차도 그렇다. 이러한 것들도 대개는 다 아류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행병인 것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포즈가 아닌, 아류가 아닌 그러한 삶을 말이다. 자신의 생존을, 그 하루하루 아니 매 일초마다의 생존을, 그 의미를, 그 가치를 존재생태계 전체의 저울대 위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존재생태계 전체의 삶을 저울질하는 환 여신의 수첩 속에 내 생존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지켜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그 여신의 수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숙자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 속에서 그녀의 생활을 본다. 중년을 넘긴 여인들의 일상이 폭넓게 펼쳐진 배경 속에서 그녀의 일상은 흘러간다. 흰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나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녀. 깨끗한 한복을 입으면 완전히 옛날의 조선 여인처럼 보일 것 같은 헤어스타일. 그러나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있을 뿐 어떤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연출하는 것일 뿐이다. 어떠한 삶인가? 그녀는 남편을 따라 돌아다닌 동해안의 바다와 산을 사랑하고, 어쩔 수 없이 밀려들어온 서울 아파트 밖의 작은 풍경들을 사랑하고, 그 아파트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드라마들을 사랑한다. 그 작은 공간에서 생활에 쫓기면서도 시를 쓸 수 있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그로부터 한걸음씩 저 멀리 보이는 어떤 봉우리를 향해서 조금씩 전진하는 아름다움을 보인다. 나는 바로 이것이 그녀의 ‘시’라고 생각한다. 멋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시인들이 발표한 싯구절의 현란한 연기에 속지 말지어다. 한 편의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인쇄된 글자들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누구든 말과 글은 멋지게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칼을 품을 수 있다. 글도 그렇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말의 뒤안길까지 읽어내야 한다. 말과 글 뒤에 숨겨진 생각과 감정, 사상과 영과 혼에 대해서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이 모든 것과 함께 존재한다. 시 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정숙자 시인에게 몇 통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이 시대에 편지라니? 그러나 몇 천 통의 이 메일을 쌓아두고 읽지 않는 내게 옛 향기를 담은 편지를 받는 것은 가벼운 흥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반드시 겉봉에 이렇게 쓴다. “헌 종이에 생명을” 그 봉투는 폐지를 활용해서 만든 것이다. 달력이나 광고지를 깔끔하게 오려붙인 이 봉투의 겉봉은 말하자면 이면지인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나의 작시학(作詩學)」에 이 ‘봉투 만들기’ 이야기를 썼다.
상상력 꼽치는 데 왕도는 없다 봉투 만든다
‘헌 종이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 죄 아니다 봉투 만든다
부쳐온 책봉투는 다시 책봉투
각양각색 이면지/파지로는 A4용지
넘어간 달력으로는 네 귀의 합 360° 짜리
편지 담을 봉투 만든다
-「나의 작시학(作詩學)」부분
그녀는 책을 읽고 시를 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없고 그녀가 바라는 완벽한 시를 짓기도 어렵다. 그러한 것들을 “바람에게 맡기고 봉투 만든다”고 말할 때 이 ‘봉투 만들기’란 과연 무엇인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봉투 하나 만들면 봉투 하나 만큼의 성취/ 편지 한 통 부치면 편지 한 통만큼의 소통/ 이런 공기가 시다 봉투 만든다”. 결국 그녀의 봉투 만들기는 단지 폐지 재활용의 경제학이 아니라 그로부터 날갯짓하며 떠오른 어떤 삶이었다. 이 시인은 은밀하게 자신의 시 쓰기와 봉투 만들기를 서로 경쟁시키고 있다. 그 둘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시적인 것인가? 그녀의 「나의 작시학」에 쓰여진 표현들은 실제로 그녀가 실생활에서 영위하는 봉투 만들기와 엮여 있다. 그 편지 봉투를 본 사람이라면 「나의 작시학」의 텍스트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봉투는 매우 아름답고 절제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시중에서 파는 편지봉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매우 사무적으로 간결한 봉투, 또 때로는 예술적으로 디자인된 예쁘장한 봉투(여학생들이 흔히 쓰는). 이러한 것들을 흉내 내면서 그러나 그와 똑같지 않게 새로 그녀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도드라지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그 특이한 봉투가 버리기 아까워 연구실 어딘가에 보관해 놓았다. 사무적이지도 예쁘지도 않은 봉투. 종이를 오리던 손길이 느껴지는 가장자리 선. 직선과 곡선의 적절한 어우러짐이 묘한 아우라를 풍기는 그 봉투. 그것은 그녀의 독서와 시 창작의 시간들을 쪼개서 만들어진 생활의 시 한 토막이었다. 쓰여진 시에 대한 불만족을 대체하는 이 ‘생활의 시’를 그녀는 봉투 만드는 성취감에서 찾는다. 이 작은 사소한 봉투 만들기는 사실 그녀의 여러 다양한 ‘생활의 시’ 가운데 한 편린처럼 놓여있는 것이다. 나는 이 ‘봉투 만들기’를 그녀의 삶과 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삼고자 한다. 이 ‘생활의 시’를 떠나 그녀의 ‘시’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시적 지향’ 없이 이러한 ‘생활의 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시인적 운명을 자신의 삶의 뿌리와 줄기로서 박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라는 것을 무슨 대단한 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시들을 읽어보면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그녀의 발언을, 그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이 세계 모든 존재들과의 어울림을 향한 발걸음이다. 달팽이와 직박구리, 한 방울의 빗방울, 먼지와 햇빛과 일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위한 것이다. 세상에는 대단한 것들이 많다. 고도의 철학, 정치적 혁명, 인류의 미래 등등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 말이다. 유명한 시인들은 대개 그러한 주제들을 시로 노래해왔다. 그에 비해 그녀의 시적 관심사는 매우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이 사소함의 미학에는 거대한 계단이 가로놓여 있다. 끝없는 길과도 같은 계단이 하늘 끝까지 걸려있다. 사소함의 발걸음은 그 영원한 길을 찬양한다. 어떠한 절망도 없이, 어떠한 초월적 포즈도 없이 말이다.
2. 종이나비의 글쓰기
나는 식민지 시대의 천재 시인 이상의 수필을 분석하면서 이상의 독특한 나비 이미지에 주목한 적이 있다. 그것은 신문을 찢은 것 같은 나비, 족보를 찢은 것 같은 나비 이미지였다. 이상에게 ‘나비’는 음울한 일상적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모티프였다. 아마도 번데기에서 탈피해서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게 되는 나비를 보고 사람들은 많은 상상을 해왔을 것이다. 크레타의 우주목 그림에도 나비가 나온다. 조셉 캠벨이란 신화학자는 우주목의 한 가지 위에 앉아있는, 영혼들의 머리 위에서 날고 있는 나비에 주목했다. 그는 그것을 죽은 영혼의 재탄생을 가리키는 기호로 보았다. 여러 문헌에서 나비는 존재의 변신을 가리키는 기호였다. 이상에게서도 신문과 족보를 찢은 것 같은 나비는 근대적 신문 매체와 과거 봉건적 신분체제를 가리키는 족보에 얽매인 존재의 변신을 가리키고 있다. 이상은 존재를 구속하는 두 가지 종이를 찢어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종이에 쓰여진 관습과 법 체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이상의 문학적 글쓰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오감도」 중 「시 제10호 나비」에서 시인의 입을 나비의 통화구로 묘사한다. 시인의 말은 곧 나비의 기호 속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정숙자 시인의「배추흰나비」에서 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적인 종이나비를 본다. 삼각팬티의 구멍을 메꾸는 데 기여한 나비가 여기 있다.
삼각팬티 두 장에 세 개의 구멍이 났다. (……)
(……) 남색으로 나비 세 마리를 수놓았다. 히히! 날개가 움직인다. 배추꽃 냄새가 난다. 날아오르는 종달새들이 수정구슬 짓바수는 소리를 낸다. 이 ‘뿌듯’하고 황홀한 춘몽……. 구멍은 간혹 예기치 못한 것을 체험케 한다.
-「배추흰나비」부분
구멍 난 팬티를 기워서 입는다는 것은 어쩐지 희극적인 일처럼 보인다. 지금은 50년대도 아니지 않은가? 시인은 그래서인지 희극적 어조와 분위기를 시 전체에 깔아놓았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의 심정을 시적 배경 속에 이렇게 깔아놓지 않으면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시는 그 일상의 땅에 뿌리박아야 하니 말이다. 그녀는 실제 팬티의 구멍을 기웠고, 그것을 시로 썼다. 생활의 시와 그로부터 비상한 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두 장’의 팬티와 ‘세 개’의 구멍은 시적인 배려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운 형태를 나비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날개가 움직이고 배추꽃 냄새가 난다’는 표현은 시적 비상에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 그런데 시인에게서는 어디까지를 현실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비 형태의 자수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는지 모른다. 날개가 움직이고 배추꽃 냄새가 난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충분히 그 자수 이미지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나비 자수 텍스트를 분석할 수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시 속에 표현된 나비 이야기가 실제 나비 자수 텍스트에 비해 진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날아오르는 종달새들이 수정구슬 짓바수는 소리를 낸다.” 이 표현은 분명히 시적인 성취로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실제로 나비를 수놓으면서 이 비슷한 ‘황홀한 춘몽’을 꾸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춘몽은 현실이 빚어낸 것이어서 현실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의 현실은 그녀의 삶이 빚어낸 것이다. 현실이라고 해서 그저 언제나 객관적으로 놓여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녀의 삶이 해와 달의 변천과 바람과 구름의 변화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일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시를 짓기도 하면서 자아내는 일상의 천이 바로 시인의 현실이 되는 것을…….
나는 「배추흰나비」를 읽으면서 정숙자 시인의 두 가지 시를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매일매일 삶의 실을 뱉어내어 자아내는 현실의 시와 또 그 현실로부터 자아지는 종이 위의 시를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시학이 아닐까? 나비는 그 현실의 구멍으로부터 탄생한다. 그 ‘구멍’에는 많은 것들을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질적인 경제적 결핍을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여러 가지 물질적 정신적 허전함들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많은 것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감이 그렇고, 자신의 존재가 빛나도록 자신을 감싸주지 못하는 많은 부분들도 그러한 허전한 구멍이 된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만의 구멍들이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구멍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구멍들을 메워주는 나비란 무엇일까? 이 시에서 시인은 각자 자신의 구멍에 맞는 ‘나비’를 찾아보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나비’ 시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마 그녀의 나비 형태 구멍 짜깁기는 종이나비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비 홀릭(butterfly holic)」이란 시를 보자. “버려지는 전단지나 신문, 잡지 등에서 나비를 오려내는 수공이 오늘도 이어진다.”라고 그녀는 썼다. 실제 생활에서 그녀가 하는 이러한 종이나비 채집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다. 아마 그녀의 ‘나비 오리기’가 더 멋진 시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손톱나비’라는 시적 이미지를 추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틈틈이 오려낸 형형색색 나비들은 작고 아름다운 나비 상자에 담겨진다.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내 편지지를 꾸며주기도 하고, 연하엽서에 배치되어 전국 방방곡곡 행운의 전령사로 날아가기도 한다. 손톱나비를 꺼내볼까.
-「나비홀릭(butterfly holic)」부분
“손톱나비란 새끼손톱만한 나비를 지칭하는 나 혼자만의 명사다.” 나비를 오리는 손과 그 손에 의해 오려진 나비는 서로 메아리처럼 반향한다. 많은 것들을 창조하는 손! 무엇인가를 사로잡고,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손! 나비를 오리며 시인은 자신의 손에 깃들인 많은 이야기들과 그 손이 오려낸 나비 이미지를 하나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여인들은 소녀시절부터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왔다. 그것은 붉은 꿈의 색이었다. ‘손톱나비’ 이미지는 그러한 꿈의 빛깔을 띠고 있다. 그녀가 만든 나비 한 마리 한 마리에 각기 다른 꿈이 있을 것이다. 연하엽서를 장식하는 그 나비에 그녀는 꿈을 실어 보낸다. 그녀의 편지는 이 나비 때문에 더욱 시적인 것이 된다.
3. 「덕전(德田)」과「온음표」의 고백주의적 생활시학
정숙자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그녀의 집안 살림이 읽힌다. 남편과 자식, 자식의 자식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의 삶까지 다 읽힌다. 자신을 미화하려 했다면 하지 못했을 이야기들도 있다. 때로 그녀의 참혹한 삶도 읽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와 그녀의 삶이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내가 앞에서 제시한 관점 즉 생활의 시와 그로부터 빚어진 창조적 시 사이의 경쟁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 쓰기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진솔하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위험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칫 자신의 개인사를 노출시키면서 자신의 개인적 삶의 한계 속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개인의 특수한 감정과 고뇌를 고백하는 시들을 쓰는 경우가 있다. 흔히 서정시를 그러한 개인적 차원의 서정적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정적 개인조차도 자신의 감정과 고뇌를 보편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시는 수필로 떨어지게 된다. 즉 신변잡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정숙자 시인은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고백 자체를 즐기는 것일까? 작은 오빠 이야기를 쓴 「덕전」을 읽으면서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시의 내용은 작은 오빠가 무 밭을 경작했는데 그 주변의 누군가가 좋은 무를 다 뽑아가고 잔챙이들만 남아 있다는 사연이다. 자신에게 보내온 그 잔챙이 무를 다듬는 장면이 이 시의 주된 이야기 줄기이다. 이 잔챙이 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그런데 무 꼬리들 용자가 다양하다. 대부분 미끈하지만 어떤 건 잔주름이 심하고 어떤 건
올통볼통 호된 힘줄이 연이어졌다. 돌멩이라도 가로막혔던 것일까. 땅강아지들이 괴롭혔을까. 두 갈래, 세 갈래 심지어 위쪽으로 되나오려던 뿌리도 있다. 이리 피하고 저리 뻗어보느라고 크지도 못한 무 무 무.
-「덕전」부분
그녀는 무를 의인화함으로써 무를 이 시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만든다. 짠김치나 동치미를 담는데 쓰도록 이리저리 쪼개어진 무. 그런데 무 꼬리를 자르지 않고 놔둔다. 그것은 “어둠 속을 뚫고 내려간 힘이 바로 이 꼬랑지”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많은 무들의 다양한 모습을 이 꼬리를 통해서 묘사한다. 결국 어둠을 뚫고 들어가 성불했다고 표현함으로써 무의 완전한 성장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보잘 것 없을 것 같은 이 꼬랑지에서 그녀는 어떤 존재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힘 같은 것을 본다. 김치를 담글 때 그것을 자르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평생토록 무 꼬리를 존중하여 밥 수저에 올릴 것이다.”
정숙자 시인이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면서도 수필적 한계에 빠지지 않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녀의 시에서 주인공들은 그녀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다만 충실한 관찰자이거나 가치 부여자이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들은 위에서처럼 무이다. 다른 시에서는 새이기도 하고 나비이기도 하며 날씨이기도 하다. 그녀의 개인사는 그러한 것들을 좀 더 절실하게 포착하려는 배경으로 등장한다.
「온음표」처럼 자신의 일상을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한 시에서도 그러할까? 5연으로 된 이 시는 매우 긴 장편 시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하나의 짧은 수필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다 여기기로 했다.” 이러한 진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던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 와서 겪게 된 생활의 한 단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자연사랑’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매우 상투적인 주제일 수 있다. ‘매일매일의 파도’ ‘옹달샘 ’‘나리꽃’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킬 수 있는 것들이 제시된 것도 평범해 보인다. 2연에서 ‘호미’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야기의 전환과 동시에 약간의 시적인 상승을 보여준다. “내 이삿짐 속에는 유독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미다.” 이 ‘호미’는 시골생활의 한 흐름을 도시 속에서 유지시켜 준다. 아파트 아래 화단을 그 호미로 가꾸기 때문이다. 매우 작은 자연의 한 편린이 이 호미를 통해서 나와 연결된다. 3연과 4연은 또 한 번의 전환과 비약을 만든다. 화단에서 뜯어온 질경이에 묻어온 달팽이가 등장한 것이다. 두 연에 걸쳐 아파트 방에까지 들어온 달팽이와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하룻밤 묵어도 괜찮겠니? 달팽이와 의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 4연에서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달팽이에게 이야기한다. 달팽이에게 책과 부엌과 컴퓨터 등 자신의 생활과 관계된 것들을 구경시켜 주기까지 한다.
5연에서는 또 다른 전환과 비약이 만들어진다. 달팽이를 화단에 데려다주고 1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설거지를 마치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신 후 ‘영원한 작별’을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는 찬바람이 불면 어느 별인가로 돌아갈 것이고, 태양이 가까워져 다시 돌아온다 해도 어찌 알아볼 수 있으리오. 나는 다만 모든 달팽이한테서 그를 만날 것이다.” 1년 뒤의 세월은 그 달팽이의 삶이 수명을 다했을 때이다. ‘영원한 작별’이라고 한 것은 그 달팽이의 죽음을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만남은 그러한 죽음의 강을 넘어간다. 시인은 모든 달팽이에게서 아니 나아가서 ‘달팽이’라는 말만으로도 그 만남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불교적 인연론을 설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흐름에서 그러한 설교조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만 시인은 자연을 숙명적으로 사랑하며, 도시의 작은 화단을 호미로 가꾸며 만나게 된 달팽이는 그러한 자연의 한 주민인 것이다. 그 주민과의 우연한 만남을 절대 잊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가 이 시의 주제가 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열정이기도 하다. ‘달팽이’라는 말만으로도 자연의 한 주민과의 연결을 지속하려는 이 절대적인 시적인 의지야말로 근대적 도시의 악마주의적 팽창 속에서 견디는 힘이 될 것이다.
4. 내면의 부엌과 꿈의 요리
정숙자의 시적 주제들은 자신의 평범한 삶처럼 지극히 평범하다. 사실 그러한 평범함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함이야말로 문학적이 되기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시로 만들어야 하는 과업. 이 무거운 과업에 그녀가 도전한다. 그 평범함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무게가 얹혀있다. 그만큼 그 주제는 광대한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도전해볼만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녀는 어떠한 방식으로 그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삶의 영원한 계단(앞에서 언급했던)에 이 평범함의 발판들을 깔아놓았다. 이 계단을 올라가는 또는 올라가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껴안아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영원한 계단 오르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고 추락하기도 한 허공의 난간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이 계단을 끝없이 노래하며 올라갈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녀의 시집 입구에 놓인 시 「희망값」이 바로 그것이다. ‘희망’이란 그저 바란다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람만으로 띄울 수 있는 게 꿈이라고 여기지 마라
뜨겁게 바삭하게 고소하게 구워진 고독, 고뇌, 고전을 지불해야만 얻어지는
백화점에서 골라올 수 없는
신의 상품
-「희망값」부분
어떤 희망이 없다면 영원한 계단 오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희망이기에 그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게 만드는가? 정숙자는 ‘희망의 고통스런 연금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허공에 띄운 연 같은 그러한 꿈을 ‘바람’만으로 띄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허공에 부는 ‘바람’과 사람들의 마음의 영역에서 부는 ‘바람’을 한데 합쳐 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내면의 부엌에서 ‘뜨겁고’ ‘고소하게’ 구워져야 한다. 광대한 허공과 대응되는 이 내면의 부엌에서 갑자기 기역자(ㄱ)의 구부러지는 힘들의 역학이 펼쳐진다. ‘고소하게’ ‘구워진’ ‘고독, 고뇌, 고전’. 아마 시인은 이 기역자 속에 삶의 ‘고통’스런 맛을 넣고자 했을 것이다. 부엌에서 몸을 구푸려 우리는 음식을 만든다. 시인은 ‘고독’ ‘고뇌’ ‘고전’ 같은 고통의 맛을 고소한 맛의 비스킷으로 치환시킨다. 내면의 부엌에서 그러한 것들은 구워진다. 처음에는 쓴 것이었지만 내면의 불길 속에서 마침내 고소해진다.
시인의 평범한 일상이 시적으로 승화되는 것은 이렇게 매우 미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말의 음향과 형태의 상징적 역학 덕분이다. 우리는 ‘고’라는 글자가 다른 글자와 이렇게 저렇게 결합하면서 자신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장면을 본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불길 요구하는 오븐에 후렴을 집어넣노라”. 내면의 부엌 오븐에 그녀는 이렇게 흥겨운 ‘후렴’을 넣기까지 한다. 이렇게 해서 부엌의 요리는 ‘고’자가 변주되는 흥겨운 노랫가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가 ‘유쾌한 무지개’였다는 것을 후세가 알게 되리라고 시인은 예언가처럼 말한다.
내가 죽고 난 뒤
내가 치른 비스킷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진지하고 유쾌한 무지개였던가를
죽음으로써만이 완납 증명된 내 꿈의 상자를
열어보라, 후세여
그대의 비스킷은 어느 하늘로 날아가는가?
-「희망값」부분
그녀는 고통의 요리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그 요리는 죽음의 순간 완성되며 끝난다. 꿈은 그러한 고통의 요리법과 관련된다. 고통의 맛을 보지 않은 꿈은 아직 진정한 꿈이 아니다. 고통을 요리하면서 더 구체화되고 더 분명한 계단을 보여주지 않는 꿈은 아직 확실한 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부엌의 구푸림의 역학을 만드는 기역자들의 변주를 통해 비로소 영원한 계단의 층계들을 이루는 니은자들의 변주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푸림의 변증법적 시학으로 그녀의 「절벽에서 날다」「근육질 개요」「모래의 각(角)」「죽음의 곡선」「뿌리 깊은 달」같은 시들을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고통과 희망의 변증법을 통해 둥글어진 달을 노래한다.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뿌리 깊은 달」). 그녀는 천상에서 벌어지는 달의 연금술을 노래한다. 하늘의 바다 속에서 마침내 둥글게 완성된 푸른 물고기. 아마도 그것은 지상의 모든 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계단에서 연주되는 고통의 연금술은 그 꼭짓점에서 이 푸른 물고기에 도달할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그 물고기를 향해 그녀의 영혼이 계속해서 날아오르는지 지켜보기로 하자.
5 생명나무 발자국을 따라
그녀의 「고백록」을 읽어본다. 왜 그녀는 편지와 읽은 책의 끝에, 초고에, 탈고일자에 시간을 적는가?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기록, 기록, 기록…… 이것은 쫓기는 자의 발자국”이라고 말한다.
왜 쫓기는가?
웬 놈이 따라 붙기에 매 순간 긴장하는가?
기록, 기록, 기록…… 기러기 떼 날아간다
쫓기지 않던 날의 시간 속으로 저들 기러기 따라 끝없이 돌아간다
-「고백록」부분
그녀는 시간 속에 사는 자는 시간에 쫓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시간을 온전히 반납할 때까지 그는 마땅히 시간에 쫓겨야 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녀는 편지의 말미, 읽은 책의 끝에 시간을 기록한다. 노트 정리한 날, 초고와 탈고 일자를 쓴다. 그것은 “시간에 쫓기는 자의 참회와 형벌”이다.
이러한 시간 강박관념은 이미 식민지 시대 시인들에게서도 나타났었다. 정지용의 시에서 그리고 이상과 김기림의 시에서 그러한 시간 강박관념이 엿보인다. 근대 상징주의 시의 선구자 보들레르가 이러한 시간 강박관념을 본격적으로 최초로 선보였었다. 정지용은 초침소리를 뇌수를 쪼으는 탁목조(啄木鳥)에 비유했다. 식민지 시대의 시간은 더 불길했었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쪼아대는 식민지 권력의 명령 소리가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지용은 「나비」라는 시에서 ‘시키지 않은 일이 하고 싶기에’ 산장에서 난로에 물푸레나무를 넣고 불을 지피고, 등피를 호호 닦으며 심지를 돋우어 불을 밝힌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나 정겨운 것들인가? 불을 때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그러한 시간조차 더 큰 어둠의 시간에 포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시간은 순식간에 달아난다. 그 작은 행복마저 언제 잃을지 모르는 불안함에 쫓기면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안의 정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숙자 시인은 탄생하기 이전의 자신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왜 쫓기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한다.
내가 누구였는가 무슨 죄과이기에 지금껏 쫓기는가 언제 풀릴 것인가 등불을 높이 쳐들고
살피는 순간
절도범이 보였다
수많은 것 중에서 그가 추켜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힘껏 달아나 울며불며 여기 태어났던 것
-「고백록」부분
그렇다. 쫓기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것이 나 자신의 죄과에서 비롯한 것인지, 그 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식민지 상황에서 식민지 권력에 쫓겼던 자들도 일종의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권력을 탓하기 전에 그들을 막아내지 못한 조상들의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의 탓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은 거울 감옥에 유폐된 자의 죄에 대해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죄수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거울 감옥을 만든 자의 죄는 더 무겁고 깊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감옥에 유폐된 자는 일종의 죄수인 셈이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죄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절망하며 허무하게 모든 것을 부정하기만 하는 삶은 무의미하다. 이상은 기계적으로 쫓아오는 시곗바늘들을 내동댕이치고, 12시 영역의 한계를 초월하는 13시의 영역으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에게 ‘나비’ 이미지는 현실의 한계를 넘어가는 일종의 시적인 탈출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숙자 시인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도 많은 종류의 시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이 잠들 수 없는 새벽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 시적 사유와 글쓰기에 주어지는 이 시간이 짧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조금 보람 있는 일을 하려면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돈처럼 시간을 아껴야 하고 또 어떤 일에는 투자되는 돈처럼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법이다. 보람 없는 일로 시간을 보낼 때 그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는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지갑에 남아 있는 금쪽같은 시간의 값어치를 느끼게 된다.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바로 그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낭비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일 분, 일 초 계산하면서, 날짜를 기록하면서 모든 일과 행위의 값어치를 매겨야 한다. 시간의 심판관이 내 인생의 무게를 저울질할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시간의 심판관을 자신 속에 내재화시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작시전(作詩戰)」에서 그녀가 시간과 사투하고 있는 격전장이 바로 시 창작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내면이 정글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시에서 정글에서의 사투는 시적 생명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양의 사리이리라”라는 멋진 구절 뒤에 “종이 위 낱낱 시어는 누군가의 심장을 말린 구슬이리라”라고 노래한다. 어떤 열대의 정글 속에서 어떤 시적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인가? 시의 우주는 광대하다. 그 우주의 불가마인 태양의 이글대는 불길 밑에서 열대의 정글이 솟구친다. 생명의 보석 같은 결정체들이 그 정글의 숲 속에서 태어난다. 시인의 내면의 정글 풍경이다. 이 시에서 ‘시간’에 대한 그녀의 다른 각도가 나타난다. “우주 시간 비추어 볼 때 지구시간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실존 또한 얼마나 짧은 끈인가”. 그러나 가볍고 짧다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그녀의 생각이 미친다. 즉 좀 더 광대한 우주 시간을 위해 지구시간을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는 발언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시와 삶을 묶어서 이 지구 시간에 바친다. 그리고 시의 날개를 갖고 우주의 하늘로 솟구친다.
나는 이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산소발자국」을 좋아한다. 마치 주술적 언어처럼 그녀는 여기서 “나무만큼만”을 끊임없이 되뇌인다.
나무만큼만 서있다 가자
나무만큼만 그림자 뉘었다 가자
나무만큼만 태양 우러러 이슬방울 빚어 올리다 가자
나무만큼만 삶을 마시고 이 세상에게 산소 먹이다 가자
나무만큼만 바람에게 말 걸다 가자
-「산소발자국」부분
나무, 이 세계의 뿌리이자 기둥이자 지붕인 것. 나무에 대한 신화적 표상을 끌어 모으면 몇 권의 책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 나무들을 모두 잘라 버린다.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선 자리에 장식처럼 몇 그루 나무를 심을 뿐이다. ‘나무만큼만’이란 표현은 이 시대에 울려 퍼져야 할 생명의 기조 저음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숲들이 사라져가는 이 위기의 시대에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이 생명나무 숲의 여신에게 저울질되고 있다. 인생의 우여곡절과 혁명을 노래하는 시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생명나무 여신은 냉정하게 이 숲의 주민들 편에 서 있다. 인간세계가 낭비하는 것들 때문에 숲의 주민들이 참혹한 상태에 몰리고 있다. 인간 세계의 번쩍거리는 희로애락 그 숱한 드라마의 현혹 속에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내몰린다. 그러나 나무들이 메말라갈 때 그 숲에 깃들인 종들이 사라져갈 때 생명나무 여신은 냉정한 칼날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정숙자 시인은 나무처럼 살고 싶어한다. “나무만큼만, 언제든 나무만큼만 그렇게 힘껏 푸르게 밝게” 너무 평범한 표현이라고? “하루를 살면 이틀이 채워지는/ 이틀을 살면 사흘이 깊어지는/ 언덕 위 나무만큼만 훨훨훨 버리고 가자” 우리는 우리가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기와 물 같은 것, 이 평범한 것을 오염시켜 점점 질식되고 있다. 시인과 비평가들은 평범한 표현들을 싫어한다. 어떤 예술적 기교를 원한다. 그러나 공기와 물 같은 단어들은, 그 평범한 단어들은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가 되었다. 장식적인 후광들이 필요하다면 위에서처럼 붙이면 된다. “이틀을 살면 사흘이 깊어지는”이라니. 나무의 생명력 그 푸르고 밝은 생명력은 이렇게 자신의 영역 밖으로 넘쳐난다. 그 나무의 넘쳐나는 생명력으로 지구상의 모든 것이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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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범순/ 충남 서천 출생.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 저서 『해방공간의 문학: 시』1988. 『한국현대시사의 매듭과 혼』1992. 『한국현대시의 퇴폐와 작은 주체』1998. 『글쓰기의 최저낙원』1993. 『깨어진 거울의 눈』(공저) 2000. 『바다의 치맛자락』2006. 『이상: 문학연구의 새로운 지평』(공저) 2006. 『이상의 사상과 예술』(공저) 2007.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 나비』2007. 『노래의 상상계』2012. 『이상 문학 연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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