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뿌리 깊은 달』표4_ 시인의 산문
정숙자
단돈 한 닢 받은 바 없이 영혼을 팔았다, ……시에게, ……후회? ……없다. 시란 간혹 그렇게 어리석은 자의 눈을 멀게 하는 빛이다. 먼눈으로 보는 빛이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이며 포착하기 어렵고 빨리 날아가는 색채이겠는가. 그것을 물감이 아닌 언어로 잡아내는 일, 그 한 편 한 편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가차 없이 일생을 탕진해 버리는 삶은 정작 그가 쓴 시보다 먼저 쓰인 신의 깃펜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펜촉에 해당하는 시인의 머리는 늘 글로 인해 긁히고 검거나 붉은 잉크가 묻으며 세상과 동떨어진 데서 다음의 스크래치를 기다린다. 괴테는 시인을 일러 “천상의 노래를 지상에 옮기는 자”라고 정의했지만 오히려 시인이란 “지상의 애환을 천상에 보고하는 자”가 아닐까? 아무튼 그가 누구든 태어나기 전부터 시인이었다면 긁힘도 고독도 마땅히 감내하고 담담히 관조하며 은근히 기뻐해야 하리라.
소회가 이와 같은 즉, 나의 시업(詩業)은 나날이 위기였으므로 나날이 싱싱할 수 있었다. 낡은 상자를 뒤적이다 보니 “끊임없는 좌절과의 싸움(2011.9.14-23:24)”이라는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순간의 종이 쪼가리가 어디 한둘일까만 “절망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2013.1.3-1:3)”는 게으름쯤 마음 한구석에 세워 두고 살아도 좋을 성싶다. 푸른 악조건이야말로 견디어 볼 가치가 더 푸르지 아니한가.
어느 날 나는 보았다. 강물 속에서 헤엄쳐 나아가는 불의 지느러미를, 그 경이로운 속도를, 불가사의의 생명체를, 언어도단의 하이퍼텍스트를! 그것은 단돈 한 닢 내지 않고 가져간 영혼을 격려키 위해 가끔씩 떨어뜨려 주는 신의 은화(銀貨), 영감이었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스친 영상을 작품으로 빚어내는 일은 철저히 인간의 몫. 도대체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그 불길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숨긴 것일까.
세월을 두고 고심한 끝에 「뿌리 깊은 달」을 탈고했다. 발표 당시에는(『애지』, 2009.가을) “뜨거운 달”이었으나 그 정도의 입체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세월을 두고 골몰했고, 결국 「뿌리 깊은 달」을 얻게 되었다. “뿌리 깊은”과 “달”이 접목되는 순간 나는 오래 끌던 시름을 놓았다. 한국적 정서와 의지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기법을 동원/압축하려 했다. 간절함, 나의 무기는 이것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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