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시집『뿌리 깊은 달』서평_ 나무의 詩/ 신진숙

검지 정숙자 2013. 7. 24. 17:24

 

 

   『다층』2013- 여름호 <서평>

 

     나무의 詩

     -정숙자 시집 『뿌리 깊은 달』

 

     신진숙

 

 

   정숙자 시인에게 시는 나무다. 나무는 뿌리 내린 곳을 떠나지 않는다. 어떤 땅이냐 어떤 토양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지에 한번 뿌리 내린 나무는 죽는 순간까지 다른 땅, 다른 지질(地質)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나무의 실존이다. 어떤 아픔이 따르더라도 나무는 자신의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떠날 수 없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삶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지표면을 따라 무한히 흘러가는 유목을 버리고 나무는 하나의 존재 안에 영원히 머문다.

   그러나 견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무가 세계와 소통하는 고유의 방식이 아닌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나무는 꽃을 만든다. 꽃은 세계를 향한 나무의 전언이다. 계절을 따라 가지를 만들고 잎과 꽃을 틔우고 씨앗을 생산한다. 새를 키우고 벌레를 키운다. 그리고 마침내 한겨울이 되면 이 모든 것을 비워낸다. 그러나 나무의 이 반복은 조금씩 진화한다. 매년 같은 주기로 생과 사를 반복하면서 뿌리는 깊어지고 사유는 넓어진다. 떠날 수 없는 고통은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기쁨, 고독과 환희, 그 어떤 것도 나무의 것 아닌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나무가 나무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나무는 유목의 땅을 포기하는 대신 시간의 유목을 선택한 것이다. 시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결국에는 다른 것이 태어나도록 만드는 창조의 장소다. 떠나지 않음으로써 나무는 나무 자신을 창조한다. 그것은 나무의 윤리다. 또 그것은 정숙자 시인이 꿈꾸는 시의 윤리이자, 그녀의 최근 시집 『뿌리 깊은 달』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꿈꾸는 본질이란 무엇인가. 나무의 성찰은 어떤 깊이에 도달하는가. 정숙자 시인에게 시적 진리란, “사물이 아닌, 사물이 지닌 원자”(「나의 作詩圖」)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즉, 감각할 수는 없으나, 모든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어떤 보이지 않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향한다. 보이는 것 내부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기원을 추구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부과된 거역할 수 없는 실존의 수동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인내하는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현상들로부터 세계의 기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도 같다. 때문에 시란 언어의 뿌리다. 오래 사유할수록 더 깊은 곳에 도달하는. 그 점에서 시의 본질은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넘어 대지의 중심을 향해 뻗어가는 나무를 닮았다. 어떠한 지형이나 토양이든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뿌리야말로 나무의 실존을 증명하는 진정한 상징이다. 나무는 뿌리를 통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정숙자 시인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자신을 속박하는 실존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기보다, 이 실존 자체를 탐색하는 뿌리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꿈꾸는 세계, 즉 “굴레 없는 차원”(「나의 作詩運」)은 무엇인가.

 

 

소용돌이 휘말려 대가리 박살났을지라도/ 산산조각 다시 뭉쳐/ 강물의 호수의 바다의 심장이 되는/ 늦가을 어스름이면 쩌렁쩌렁/ 더욱더 불타오르는/ 그물로 작살로도 건질 수 없는/ 눈으로만이 만질 수 있는/ 오로지, 오직 한 마리//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 산 넘어 또 산 넘어 서방정토까지 혼자이지만//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 실개울에도 흐르고 있어/ 우리들 가슴에도 뿌려져 있어/ 내 인생 견문록 참회록에도 새겨져 있어// 천천히 찬찬히 구름과 바람 사이를/ 온밤을 꿋꿋이 돌보고 있어

   -「뿌리 깊은 달」전문

 

   이 세계의 핵심은, 한 장소에 오래 붙박인 수동적 삶이 어떤 우주적 깊이에 도달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달이 뜨고 지는 일은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반복이지만, 달은 이 영원한 반복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획득한다. 달은 생사의 반복 속에서 비로소 ‘달’이라는 본질에 도달한다. 물의 표면에 비쳐진 달이 “산산조각” 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미망이다. 본질의 시각에서 본다면, 달은 변함없는 하나다. 무수한 현상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달은 하늘에 떠서 세상을 고요히 비추고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만질 수 없으며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존재.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단순함에서 비롯한다. 달은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존재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그 자체로 순수하고 완전하다. 과도한 수사나 느낌도 없다. 단지 채우고 비우는 행위를 영원히 지속할 뿐이다. 도망치거나 푸념하는 법 없이. 독특하게도 시인은 이러한 달의 본질을 나무의 상상력과 결합한다. “달”이 “뿌리 깊은” 존재라는 상징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달을 우주에 뿌리 내린 한 그루 나무로 인식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주 만물의 순환이 이 달을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가진 후 곧바로 그 모든 것을 비워낸다는 점에서 달과 나무는 하나다.

   정숙자 시인은 시가 이 달과 나무의 본질을 닮기를 희망한다. 채움과 비움, 생과 사, 풍요와 폐허를 오가는 이 우주적 리듬 속에서 언어가 뿌리 내리기를 원한다. 이 때문에 시인은 문명이 부여한 모든 것을 덜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나의 作詩窓」)하는 것. 즉 의미의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덜어내고 다듬어 언어가 현상을 넘어 본질에 뿌리 내릴 수 있기를 꿈꾼다. 새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을 다 한 연후에 집을 버리는 것처럼. 시인은 이제까지 그녀가 지어왔던 언어의 집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버리는 것만이 시의 “여운이 내내 맑고 넉넉하”(「버리기 위한 집」)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닳아지면 둥글어지고 둥글어지면 다시 깨”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마모의 시간”을 견디어 낼 것이다. (「모래의 角」)

 

   한편 언어로부터 무엇을 버리고 덜어낸다는 것은 마음의 일이기도 하다. 특히 정숙자 시인에게 언어와 마음은 하나다.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언어는 버려지지 않는다. 정신과 언어가 분리될 수 없다. 나무의 몸은 그 자체로 나무의 정신이다. 달이 달의 마음의 현신이듯. 언어와 마음은 일치한다. 그러나 완벽한 일치란 불가능하다. 세속적인 욕망이 제거된 삶이란 없다. 그러므로 시인의 “내면은 정글이다”(「나의 作詩戰」). “사소한 꼬투리에도 온 정신이 펄럭”(「신경쇠약」)이지 않던가. 그러므로 완벽을 꿈꾸는 자에게 삶은 가파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위태롭고 또 자유로운 시의 역설들이 이 불안정한 토대 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정신의 극단을 통해 언어는 벼려진다. 그러므로 완전을 꿈꾸는 시인은 이 정신의 극단을 향해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정숙자 시인이 삶을 절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절벽이란/ 죽음의 입구였다/ 나는 조류가 아니었기에// 한 눈금 한 눈금 서슬 푸른 벼랑이 밤사이에 몇 척씩 자라 올랐다/ 그 수치는 날더러 꺼지라는 암호였다 질시였다 박해였다// 나는 침묵했다/ 침묵 속에 절벽을 구겨 넣었다/ 절벽은 구겨지면서 내 속울음보다 더 붉게 오열했다// 그런 절벽도 처음에는 우리 집 앞마당 버금의 지반이었다. 그러나 지반은 언제라도 지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나는 뒤늦게 날개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했다. 비상(飛翔)만이 별의별 절벽들을 일거에 그어버릴 도구였기에. 그리고 폐활량을 늘렸다.// 심신만 건강하다면/ 내 식탁과 컴퓨터만 깨지지 않는다면/ 절벽은 능히/ 놀 만한 장소였다// 물경, 절벽이 아닌 시간은/ 백색소음 질척거리는/ 저잣거리일 뿐이었다

   -「절벽에서 날다」전문

 

   어떤 의미에서 정숙자 시인에게 절벽은 다른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벽이다. 시인의 고독과 공포, 환희와 절망은 언제나 시인 자신의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한 그루 나무처럼, 자신의 실존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실존재의 고통은 어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쓸쓸함A를 묻을 곳이란 내 가슴뿐”(「쓰쓰가무시병」)이다. 자유를 꿈꾸는 한, 삶은 “박해”일 수밖에 없다. 나무의 풍요로움 뒤에는 언제나 그 자신의 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고통이 존재한다. 그러나 날개는 절벽의 사유에서 온다. 비상할 수 없는 부자유는 역설적으로 나무의 “폐활량”을 키운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절벽은 능히/놀 만한 장소”가 된다. 절벽의 극단적인 고통만이, 생생한 삶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꿈을 꿀수록 절벽에 서게 되는 이 모순으로부터 시인이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시인은 말한다.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거야”(「정신승리법」)라고. 또 “시는, 내 신앙이며 궁극이다”(「나의 作詩夢」)라고도 말한다. 이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림자와 시 사이의 변증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변증.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나무”의 시. 나무의 사유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완전함과 절벽의 고통을 어떻게 변증해 낼 수 있었는가. 완전을 꿈꿀수록 더 커지기만 하는 절벽의 허무를 어떤 방식으로 견딜 수 있었을까.

 

  나무만큼만 서있다 가자/ 나무만큼만 그림자 뉘었다 가자/ 나무만큼만 태양 우러러 이슬 방울 빚어 올리다 가자/ 나무만큼만 삶을 마시고 이 세상에게 산소 먹이다 가자/ 나무만큼만 바람에게 말 걸다 가자

   -「산소발자국」부분

 

   나무라는 상징은 오래 되었다. 나무는 수직적인 삶의 가파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 수직의 삶이 지닌 수평적인 평화를 암시한다. 뿌리로부터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상승하는 에너지와 바람과 대지,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시 덜어내는 비움의 의지가 결합한 존재이다. 시인이 “나무만큼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나무의 시가 서 있는 땅에 가까이 다가선다. 나무는 문명의 대척점이다. 문명의 소유욕은 성찰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랜 사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삶의 지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풍요와 너무 많은 변화가 정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나무도, 어떤 이슬도 세계에 대해 영원한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자연은 낭비를 알지 못한다. 채워진 것을 비우고 덜어내는 것, 그것은 나무가, 달이, 이슬이, 온 우주가 하는 가장 단순하면서 완전한 일이다. 나무는, 달은, 이슬은, 문명을 치유하는 시(詩)의 동기이자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이 나무의 “공력”, 한 자리에 머물며 깊어지는 뿌리의 존재를 사유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흙의 태양의 바람의 비의…… 새들의 노래와 구름…… 이슬과 전설의 지문까지도 온몸에 새”겨 넣은 나무(「흘림체가 흐르는 공간」)의 지문을 읽는 것은 시의 일이다. 시는, “밤새 들었던 푸나무의 애환을 창공에 수납하고 애별샛별 방창한 새벽녘이면 다시 내려와 제 목숨의 전부를 풀잎에 선사”하는 이슬의 내력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소소소」)

 

   정숙자 시인에게 나무가 표지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나무는, 달이나 이슬처럼,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움직인다. 언어는 나무를 상상하는 동안 무한해진다. 시가 나무에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시를 생산한다. 따라서 시가 어떤 창조적인 생산과 흐름을 멈추는 순간, 언어는 다른 세속적인 정지된 사물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숙자 시인이 하나의 현상에 대해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명사”(「나비홀릭」)라고 말한 신조어들을 예로 들 수도 있겠다. “빗발꽃”(「빗발꽃」), “을래”(「나비홀릭」), “물별”(「사랑대첩」) 등. 무언가를 창조하고 생산한다는 것은 시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살아 있는 나무의 시는 완성될 수 있는가. 완전한 삶에 대한 추구는 그 자체로 불가능하기에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시가, 완전한 것에 정답을 제시하는 순간, 시는 멈춘다. 시는 시를 창조한 ‘시인’이라는 존재, ‘나’라는 원본 자체마저 지울 수 있을 때 자유롭지 않은가. 하여 우리는 여전히 기다린다. 나무의 언어, 나무의 상상력, 나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기를 거부하는 시의 나무. 혹은 유목하는 나무의 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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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유심』으로 등단. 평론집『윤리적인 유혹』,『아름다움의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