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평론, <정신승리법> 편들기/ 박찬일

검지 정숙자 2013. 7. 6. 02:26

 

 <『현대시학』2006. 11/ 이달의 작품>

 

 

     <정신승리법> 편들기

 

      박찬일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거야

    그림자는 밟힘의 힘으로 사는 거고

    어둠을 봐

    그림자가 없잖아

    걷는다는 것은 밟는다는 것이고 밟는다는 것은 나아간다

 는 것이고, 밟힌다는 것은 한순간 누군가의 대지가 되어준다

 는 뜻이야

    그렇지만 그 누구라도 맨 먼저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거야

    맨 나중에도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자신의 그림자 위로 자

 신의 그림자와 함께 쓰러질 거야

    그러니까 그림자는 힘, 기댈 곳이야

    어떤 이가 너를 밟고 지나간다면 그 순간 너는 그에게 힘

 이 되어주는 거지

    너는 그를 자라게 할 거야

    또 다른 이는 그를 밟고 지나갈 거고

    모두들 그렇게 진화해 왔을 거야

    조물주는 먼저 물을 흐르게 하거나 식물의 싹을 틔운 게 아

 니라 태양 속에 그림자부터 심으셨던 거야

    태양조차도 그림자가 없으면 안되었던 거지

    너는 너 자신의 그림자야

    그림자는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는 다시 그림자를

  온전케 하고

                     - 정숙자「정신승리법」(『시현실』2006 가을호)

 

 

   1. <그림자의 힘>에 대하여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림자의 힘으로 사는 거야>) 그림자는 플라톤식으로 이해하면 현상이다. 칸트식으로 얘기하면 감각계이다. 현상/본질, 감각계/초감각계에서 본질보다 못한 것, 초감각계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다. 서양정신사에서는 <이항대립>으로 설명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항을 설정하고 한쪽에 우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그랬다. 기독교에서는 현세/내세를 구분하고 내세에 우위를 부여하였다. 근대사상에서도 이것은 되풀이되었다. 남자/여자, 인간/자연, 이성/감성 등을 구분하고 남자에, 인간에, 이성들에 우위를 부여하였다. 근대를 열었다는 콜럼버스, 갈릴레이, 루터의 경우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지동설/천동설에 우위를 부여한 것이고,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인/동양인에서 서양인에게 우위를 부여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갈릴레이의 지동설 증명과 함께 신성불가침의세계를 <신성 가침의 세계>로 바꾼 것이다.

   <그림자의 힘>이라고 한 것은 간단히 현상의 힘, 감각의 힘을 얘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상계/본질계, 감각계/초감각계에서 현상계에, 감각계에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상계, 감각계들은 삶을 표상하므로 <그림자의 힘>을 간단히 <삶을 무한히 긍정하는 자세>로 볼 수 있다. 본질계, 초감각계들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 있다. 삶은―그림자가 암시하듯이― <희노애락의 세계>이다. 혹은 희보다는 노, 락보다는 애가 더 많은 세계이다. 그리고 삶은 몰락의 세계이다. 본질계, 초감각계, 혹은 내세들은 희노애락이 없는 세계이다. 노가 없으니까 희가 없고, 애가 없으니까 락이 없는 세계이다. <영원한 세계>이므로 몰락이 없는 세계이다. 그림자의 힘을 얘기한 것은 요컨대, 희노애락을 포함한 삶의 힘을 얘기한 것이다. 몰락을 포함하고 있는 삶의 힘을 얘기한 것이다.

   그림자가 삶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어둠을 봐/그림자가 없잖아>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자 없는 어둠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는 밝음을 긍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밝음과 인접의 관계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태양이다. 태양은 다시 삶과 인접의 관계에 있다. 인접의 관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태양 없는 삶은 없다. 태양 없는 삶을 다르게 말하면 <그림자 없는 삶>이다. 이점에서 또한 주목되는 표현이

 

    조물주는 먼저 물을 흐르게 하거나 식물의 싹을 틔운 게 아니라 태양 속에 그림자부터 심으셨던 거야/태양조차도 그림자가 없으면 안 되었던 거지 

 

   이다. 특히 <조물주가 태양 속에 그림자부터 심으셨다>고 한 것이다. 태양 속의 그림자! 태양과 그림자를 하나로 본 것이다. 그림자가 태양이고 태양이 그림자라고 한 것이다. 태양이 삶 그 자체를 표상한다면 그림자 또한 삶 그 자체를 표상하는 셈이다.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 이것이 이 시의 주요 테마라고 주장할 수 있다.

 

 

   2. <대지>에 대하여

   정숙자는 다섯 째 줄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밟힌다는 것은 한순간 누군가의 대지가 되어준다는 뜻

 

   <밟힌다는 것은 한순간 누군가의 대지가 되어준다는 뜻>?! <대지>가 이렇게 사용될 줄 몰랐다. 대지는 펄벅의 <대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니체의 <대지>를 떠올리게 한다. 니체는 많은 곳에서 <대지>를 사용하였다. 대지는 삶의 표상이었다. 삶을 긍정하라고 한 것은 대지를 긍정하라고 한 것이었다. 대지의 獅子는 포효한다. <죽음이여 오라 기꺼이 죽어주마!>

   정숙자의 대지는 발판 혹은 지지대를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밟힌다는 한순간 누군가의 대지가 되어준다는 것>은 밟혀서 누군가의 힘이 되어준다고 한 것이다. 정숙자는 몇 행 뒤에 <어떤 이가 너를 밟고 지나간다면 그 순간 너는 그에게 힘이 되어주는 거지>라며 이를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발판․지지대로서의 대지를 말하고 있다. 대지는 그러므로 소신공양과 인접의 관계에 있다. 혹은 희생과 인접의 관계에 있다. 희생․소신공양 또한 삶의 주요 세목들이다. 악덕들이 삶의 주요 세목들인 것처럼 덕 또한 삶의 주요 세목들이다. 니체는 악덕으로서의 대지를 주로 언급했었다. 대지는 살의욕, 자살욕, 이기심, 정욕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정숙자는 이에 반해 덕으로서의 대지를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덕은 대부분의 경우 악덕에 지게 되어 있다. 악의 충동은 선의 충동을 이기게 되어 있다. 불안은 의지를 이기게 되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덕의 승리를 말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주목되는 표현이 <그림자는 밟힘의 힘으로 사는 거>라고 한 것이다. <정신승리법>이라고 한 것이다. <그림자>가―앞에서 논의한 대로―<삶 그 자체>를 표상한다면 삶은

  <밟힘의 힘>으로 산다고 한 것이다. 삶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 <밟힘에 대한 긍정>으로까지 전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몰락․죽음>을 넓은 의미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3. 정신승리법 편들기

   문제는 패배 대한 긍정으로서의 전진을 넘어 또 하나의 전진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정신승리법>으로 <패배=승리>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혹은 <소신공양․희생〓승리>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밟힘>이라고 하지 않고 <밟힘의 힘>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밟힘의 힘으로 사는 거>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끝에서 <〔밟히는〕그림자는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신승리법>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밟힘으로써 우리는 힘을 얻고, 우리는 자라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 정숙자 본인의 <정신승리법>에 대한 <시작노트>에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정신승리법>의 출전은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이었음을 굳이 밝힌다. 주인공 아큐는 건달패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세상으로부터 모멸을 당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승리자라고 여기며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나 또한 아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위인이므로 어찌 ‘정신승리법’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오늘에 이르도록 나는 대한민국 헌법이나 국제법보다도 ‘정신승리법’에 더 많은 은혜를 입지 않았나 싶다. 

 

   <지는 것도 이기는 것일 수 있다>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정신승리법이 통속적 자기 암시․통속적 자기 합리화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통속적 자기 암시․통속적 자기 합리화가 인생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통속적 자기 암시․통속적 자기 합리화이다. 더구나 그 인생이 희생자이기만 하였고, 희생자이기만 할 것이고, 패배자이기만 하였고, 패배자이기만 할 것이라면, 희생자이기만 할 것이라면 희생자․패배자에게 정신승리법은 최고의 명약이다. (정신승리법이 널리널리 퍼져나가 희생자도 패배자도 기죽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제는 정신승리법이 통하지 않는 희생의 화신․패배의 화신이 있다는 것. 이에 대한 성찰도 재미있을 것이다.)

   간단히 통속적 자기 암시․통속적 자기 합리화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림자의 운명> 때문이다. 그림자는 밟히려고 밟히는 것이 아니다. 밟혀야 하기 때문에 밟히는 것이다. 또 밟힘으로써 힘을 얻겠다는 생각이 없다. 밟힘으로써 밟은 것에 힘을 줄 뿐이다. 대지가 힘을 주는 것처럼, 문제는 <시적 주체>이다. 밟힘에서 힘을 얻어내는, 나아가 승리를 읽어내는 시적 주체이다. 밟힘이 희생이 아니라고, 패배가 아니라고 하는 시적 주체이다. 밟힘이 <누군가>를, <그>를, <또 다른 이>를, <모두들>을, <우리>를 <자라게> 해준다고 믿는 시적 주체이다.

   시는 즐거움과 유익함을 주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인식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유익함이다. 정숙자의 <정신승리법>은 이의 모범적 예이다. 다르게 말해 보자. 『정신승리법』은 그림자에 위의를 부여하였다. 그림자에 위의를 부여한 것은 가짜에 위의를 부여한 것이다. 패배에 위의를 부여한 것이다. 시는 이런 것이다. 진짜에 위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에 위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

 

 

* 박찬일/춘천 출생, 1993년『현대시사상』으로 등단

* 시집/『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나비를 보는 고통』『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인류』『북극점』

* 시론집/『해석은 발명이다』『사랑, 혹은 에로티즘』『근대: 이항대립체계의 실체』

             『박찬일의 시간 있는 아침』『시의 위의―알레고리』

* 연구서/ 『독일 대도시시 연구』『시를 말하다』,『브레히트 시의 이해』

*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 <위의 시 <정신승리법>은 시집『뿌리 깊은 달』에 수록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