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시집 · 뿌리 깊은 달

시집『뿌리 깊은 달』서평_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치유의 모색/ 김윤정

검지 정숙자 2013. 7. 4. 12:58

 

 

  『詩現實』2013-여름호 <시집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치유의 모색

    -정숙자 『뿌리 깊은 달』

 

    김윤정

 

 

  존재에 대한 논의의 겹들

  하나의 소우주이자 우주의 큰 흐름 가운데 놓인 존재면서도 그러한 규정 아래서조차 결코 위대하다거나 평온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문제 삼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지연의 일부로 살아가면서도 그러한 규정이 상투적인 수사로서만 유통될 뿐 의미 있는 내포로 소통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과제에 해당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곳에 어떤 공기가 흘러 다니고 그것이 공동체를 어떤 모습으로 빚어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행해져야 한다. 이와 같은 우주와 자연, 사람과 사회에 관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해결을 위한 성실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이와 관한 고민들이 단지 철학적 차원의 고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나’의 평온과 행복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가장 내밀한 존재론적 고민들은 사회와 사람, 자연과 우주에 관한 총괄적인 논의와 관련되고, 이들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이야말로 고독과 불행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원하는 가장 합당한 길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나’의 존재조건에 관한 질문은 비단 개인의 나르시즘적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회, 자연과 우주 전체에 관한 문제를 포함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사람과 사회, 자연과 우주는 단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나 거론되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가장 본질적인 존재 조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들 문제들은 제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호흡하고 있는 ‘나’를 둘러싼 가장 근본적이고도 직접적인 조건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들 문제들은 대부분 각각의 영역과 세계관에 따라 분리되어 인식되기 마련이다. 이들 문제들은 각기 분리된 영역 속에서 독자적인 논리에 따라 언급되는 것이다. 가령 자연과 우주의 개념을 사람과 사회의 개념과 함께 얘기하는 일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각각은 서로 차지하는 영역이 다르고 논의되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조했듯이 이 모든 것은 존재에 관한 단일한 문제이다. 이 모든 것은 존재를 둘러싼 모두 동일한 성질의 조건을 형성한다. 이 모든 것은 균질한 것이자 모두 같은 차원의 문제이다. ‘나’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차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일은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길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함의하는 것이다.  

 

 

  도시 속의 작은 서정의 공간

  시를 통해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정숙자 시인이 현재 사는 곳은 ‘서울’이다. 그녀는 군인인 남편을 따라 주로 속초, 강릉 등의 동해안 지역에서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행을 결정했다’(「온음표」). ‘김제 만경 너른 들판’(「온음표」)이 고향인 그녀에게 물론 ‘서울’은 살기에 결코 탐탁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끔 ‘절벽’에 대해 언급한다. 그녀는 ‘한 눈금 한 눈금 서슬 푸른 벼랑이 밤사이에 몇 척씩 자라 올랐다’(「절벽에서 날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쓰레기장이 아니라면/ 이렇게 검을 수 있나 악취가 날 수가 있나’(「역린」)라고 묻기도 한다. ‘주야장천 책상과 컴퓨터, 황량한 시계를 거느린’(「몽상문」), 영락없이 도시적 일상에 매인 시인에게 ‘서울’은 자연의 서정적 공간과 대조되는 황폐하고 각박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살면서 시인은 종종 거친 ‘전투’를 떠올린다.

 

 

    내면이 정글이다

    내면을 장악한 게 고통이라면 나는 그놈을 사냥할 것이다

    관찰 해부 소화할 것이다

    태양은 구름장 지우며 돌고 나는 바람 맞으며 탄다

    모든 생명은 태양의 사리이리라

    종이 위 낱낱 시어는 누군가의 심장을 말린 구슬이라라

    눈물 통통 살 오르는 날 나는 물었다

    우주 시간 비추어 볼 때 지구 시간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실존 또한 얼마나 짧은 끈인가

    아끼지 않을 것이다

    희귀한 놈 걸리면 더욱 예리한, 은밀/정밀한 칼질 필요하겠지

      -「나의 작시전(作詩戰)」부분

 

 

  「신경쇠약」에서 시인은 ‘내 안에 젖은 칼 있다’, ‘하루라도 갈지 않으면 칼날은 영감(靈感)이 아닌 내 목을 치리라’고 쓴다. 그 표현의 생경함과 직접성을 볼 때 시인의 시에 종종 나타나는 ‘칼’ 이미지는 다소 뜻밖이다. ‘칼’을 둘러싼 시인의 거침없는 태도는 여상다운 섬세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끌어오는 ‘칼’ 이미지는 ‘시 쓰기’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신경쇠약」에서의 ‘칼’이 ‘토씨, 어찌씨’ 등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등의 글자들을 향하여 있는 것처럼 위 시에서 역시 ‘칼질’은 ‘작시’를 위한 것이 된다. ‘작시전(作詩戰)’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시를 짓는 일을 ‘전투’와 연관시키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투’는 ‘내면을 장악한 고통’과의 싸움을 가리킨다. 그는 ‘내면이 정글’이라면서 그것을 ‘관찰 해부 소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내면’을 정글로 보고 이에 대한 ‘칼질’이 곧 ‘시’라는 언급은 시인의 시에 대한 자의식이 ‘언어미학’에 놓여 있다기보다 ‘세계인식’에 있음을 시사한다. 시란 미학성의 측면에서 존재이유를 둔다기보다 진정성 여부에 의해 그 가치가 가름된다는 생각이 여기에 있다. 특히 시인은 시의 진정성을 ‘내면’의 관찰, 해부, 소화‘에 두고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통해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시의 목적이자 이유가 된다.

   시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일견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나 다른 한편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내면의 고통’과의 싸움을 ‘전투’라고 여기는 데서 그러하다. ‘은밀/정밀한 칼질’이 필요한 ‘희귀한 놈’이라는 지적은 ‘고통’을 단지 감정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적해야 할 실체로 보는 것이리라. ‘칼’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고통’이라는 실체 앞에서 마치 ‘사냥’을 하는 장수처럼 의기충천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태양의 사리인 생멸’, ‘심장을 말린 구슬’에 비해 볼 때 특히 ‘희귀한 고통’은 ‘예리한 칼질’이 요구되는 표적이 된다. 이는 시인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 ‘내면’의 평화이자 ‘생명’이요, 그것은 치열한 투쟁을 통해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인에게 시는 그러한 내적 생명을 위한 방법적 도구이자 내적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인 셈이다.

  내면의 고통을 일으키는 요소를 실체이자 싸워야 할 적으로 보는 관점은 시 「식장(食葬」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공동묘지 무섭다 마라

    우리네 뱃속은

    그보다 서늘한 협곡이니

 

    (중략)

 

    몇 굽이 창자 안에 그리 무안한 저주파가 흐르다니!

 

    무덤 하나마다 복부가 하나

    복부 하나마다 무덤이 즐비

    형형색색 뱃속에선 해체된 주검들이

    삶에서 삶으로 또 다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끊임없이 육탈-소화-복제된다

 

    걸어 다니는 무덤들, 뒤집어진 아침들, 미욱한 입口자들

      -「식장(食葬)」부분

 

 

   ‘시의 본질이 언어미학이 아니라 세계인식에 놓여 있다’라는 명제에 부합하듯 위의 시는 세계에 관한 아주 낯선 인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덤 하나마다 복부가 하나/ 복부 하나마다 무덤이 즐비’라는 인식, ‘형형색색 뱃속에선 해체된 주검들이/ 삶에서 삶으로 또 다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끊임없이 육탈-소화-복제 된다’는 인식은 마치 요령부득인 주술처럼 다가온다. 다른 한편 이것은 우주의 이치에 관해 통달한 자가 중생들에게 알려주는 진리의 메시지처럼도 여겨진다.

  시인의 전언대로 우리는 ‘뱃속’에 가득 찬 고통의 근원들에 관해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으리라.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원죄라든가 인간의 타자성 등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과 세계에 관한 인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속엔 내면의 생명과 평화란 ‘서늘한 뱃속의 주검들’에 의해 위협당하는 것이요, 시는 곧 ‘끊임없이 육탈-소화-복제’되는 ‘뱃속 무덤들’과 싸우기 위한 ‘칼질’이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시인은 그것이 상상적인 것이든, 실제인 것이든 인간에 관한 인식과 관련하여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위에 서 있거니와, 이러한 관점에 서면 낯설고 생경하게만 느껴졌던 시인의 ‘칼’ 이미지는 어쩌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극히 정당하고 자연스런 생의 태도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뱃속’에 ‘무덤’이 있고 이것이 ‘내면의 고통’을 일으키는 요소이자 ‘장악’해야 할 실체라는 사실은 시인의 ‘생명’을 향한 열정과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가를 잘 말해준다. 더욱이 그러한 투쟁이 ‘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시’에 관한 시인의 접근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녀에게 ‘시’는 생의 모든 사건과 역사가 펼쳐지는 하얀 ‘종이’에 해당한다.

 

 

    한 편의 시가 한 번의 기회다

    그 한 번의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 한 번의 빨강, 그 한 번의 주황, 그 한 칸의 노랑 초록 파랑 쪽빛 보랏빛의

  박자와 음음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미래가 달린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과거도 변한다

    지금 쓰는 이 한 편에 오늘이 풀린다

 

    (중략)

 

    모골이 송연하다.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에 목을 맡긴다. 그렇게 나는 쉰여섯

에 왔다. 예순 쪽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리라.

     -「나의 작시욕(作詩慾)」부분

 

 

  시인에게 시란 과연 무엇인가? 시인이 ‘시’에 ‘미래’와 ‘과거’, ‘오늘’을 투영시킬 만큼 시는 그토록 위대한 것인가? 위 시는 시에 관한 시인의 강한 자위식과 애정을 잘 표현하고 있거니와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곧 생 자체의 수준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시의 ‘한 행, 한 음보, 한 음절에 목을 맡긴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에게 시는 ‘일거수일투족 일초일순’을 모두 ‘틈서리’로 하는 것이자 ‘열정’이고 ‘욕망’이며 ‘운명’이자 ‘축복’이다. 그녀는 오직 ‘죽음’만이 시에서 자신을 떼어놓을 있다고 말한다(「나의 작시욕(作詩慾)」). 또한 시인은 ‘시를 통해 세상을 읽’고, ‘세상을 통해 시를 읽’는다(「나의 작시기(作詩記)」)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시는 세상을 읽는 창이요 세상으로 가는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시인의 처음과 끝, 호흡과 동작의 모든 것에 해당한다.

   이는 시인에게 시가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몸 그 자체라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 편의 시가 한 번의 기회’가 되며 ‘ 시 한 편에 미래가 달리’고, ‘과거가 변하’고, ‘오늘이 뚫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가 몸과 다르지 않으므로 시는 시인의 음성이 되고 시인의 상태가 된다할 것이다. 즉 시는 시인의 몸 상태를 리드하는 매개체이다. 이쯤 되면 시는 도를 구하는 매개가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인이 추구하였던 내면의 평화와 생명이 곧 시를 통해 구해지는 것인바, 시는 생명을 가로막는 것과의 투쟁의 칼이 된다는 말도 여기에서 성립된다. 시의 한 음 한 음을 발성하면서 그녀는 그녀의 생명성을 감하는 실체들과 대결하고 더욱 고양된 생명에로 나아가는 작업을 행할 것이다.

   시를 통해 생명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시인에게 에너지원이 되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태양’이다. 그것도 비유나 수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질적 차원에서 그러하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라 여기기로 했다. 시골 태생인 탓도 있지만 남편(군인)을 따라 전방으로, 오지로 전전하는 사이 나는 그야말로 자연 사랑의 졸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김제 만경 너른 들판은 내 태가 묻힌 곳이려니와, 부산 강릉 속초 삼척 묵호 정동진 안목 경포대 삼포 물치 간성 거진 화진포 비무장지대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구석구석 정 붙이며 살았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중략) 그 도도라진 풍경들을 뒤로하고 이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행을 결정했지만, 나는 누누이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이야’라고.

     -「온음표」부분

 

 

  위의 시에는 오염되지 않은 외지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살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낱낱이 묻어있다. 시골이 고향이었던 점은 자연에의 애착과 친연성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이리라. 이를 배경으로 한다면 ‘서울’이란 지역은 시인에게 그야말로 절망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서울’에도 ‘태양’은 비친다. 비록 칙칙하고 뿌연 공기로 반사될망정 ‘태양’은 온 구석구석까지 빛을 주기 마련이다. 가끔 햇살이 다사롭게 비치는 날이면 번잡한 도시에서도 온기와 활기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 따라서 시인은 그러한 햇살을 긍정하기로 한다. 물론 의식적인 ‘위로’이긴 하지만 ‘태양이 비치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자연’인 것이다. 시인은 황량하고 각박한 도시 속에서도 자연을 느끼고 생명의 에너지를 끌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작은 텃밭 가꾸기이다. 같은 시에서 시인은 ‘내 이삿짐 속에는 유독 빼놓을 수 없는 물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도 하루 한 번, 적어도 삼사일에 한 번은 호미를 들’고 건물 밑동에 딸린 ‘손수건만한 꽃밭’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또 그녀는 ‘아무리 도심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호미를 댈 만한 곳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라고 넌지시 귀띔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작은 꽃밭을 가꾸면서 그녀가 체험하는 작은 기쁨과 생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도심 한 구석에서 조촐하게 피어나는 식물이지만 시인은 여기에서 자연과의 동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호미‘로 길어낸 작은 생명은 비록 대자연의 풍성함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자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편안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 되어준다. 도시에서 행하는 이런 작은 실천들이 얼마나 강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이루어내는 이러한 행동들이 시인의 내면에서 벌이는 투쟁에 필수불가결한 힘의 원천이 되리라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또한 황폐한 도시에서 힘내며 살아가기 위한 나자의 노력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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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정: 문학평론가. 2007년『시현실』등단. 저서에『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등.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