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었으므로 빛난다
정숙자
프로펠러가 별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저것을 누가 강물이라 엮는가
(폭포 이후 저것은 수평으로 흐르는 비행 물체다)
귀 기울여보라
젖은 밤
가로등 아래
아스팔트도 벤치도 길섶 풀잎 돌멩이들도 윙윙윙 빛
을 뿌린다
활주로 따윈 없어도 그만, 제각기 섬광을 띠며 멀리멀
리 혹은 따뜻한 혹성을 향해 나는 중이다. 먼지 묻은 어
깨여 안녕, 밟히고 차인 머리여 안녕, 하나하나 계단에 목
마를 필요도 없다. 제자리서 - 혼자서도 높이높이 드높이
솟구쳐 난다.
젖었으므로
풀린다
씨앗도 구근도
꽃봉오리 달팽이도 유리조각도 싱싱싱 빛을 펼친다
저것을 누가 바이칼이라 묶는가
(방랑 이후 저것은 고요로 정착한 비행 물체다)
눈동자도 눈시울도, 송아지의 분만도 젖지 않으면 그대
로 부식, 겨우내 길몽을 꾼 개구리들과 잘 벼린 내일도 화
석이 될 뿐. 젖은 아침- 절벽에 스며드는 태양을 보라. 세
포마다 빛을 머금고 피어오르는 구릉을 보라.
프로펠러가 별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젖었으므로
젖었으므로
아스팔트도 벤치도 길섶 풀잎 돌멩이들도
별로 깨어 지금은 정지비행 중
-『애지』2013-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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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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