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예상했던 일 외 2편/ 이서화

검지 정숙자 2024. 11. 16. 01:34

 

    예상했던 일 외 1편

 

     이서하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대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없어

  예상하는 일도 없다

 

  분간도 모르는 한때가

  자장가 속에서 서성인다

      -전문(p. 52-53)

 

     -------------------

 

    그리고 며칠 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자주색 자개 문갑

  오른쪽 서랍이 열리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일이 어디 서랍뿐인가 

 

  잠긴 서랍에서 손톱깎기를 꺼내 손톱을 깎았다

  손톱이 튀는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깼다 

  꿈은 가끔 열리지 않는 생시를 열곤 하니까

  대수롭지 않았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던

  문갑을 현관 입구 쪽으로 옮기고

  가족사진들을 닦아서 가지런하게 올려 두었다

  가족은 열려 있으면서

  닫혀

  그 또한 대수롭지 않았다

 

  양배추를 썰다 손가락 끝을 잘랐다

  피가 솟는 손가락을 붙들고 응급실로 뛰었다

  며칠 후 의자에 올라가 싱크대 상부 장 정리를 하고

  내려오다가 허공을 디뎌 그대로 넘어졌다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 대기실에서 처음 본 여자는

  내 눈 뒤에 숨어 힐끔거리는 여자에게 말했다

  "집 안에 관을 모셔두고 있구먼"

 

  그제야 열리지 않는

  자주색 문갑의 오른쪽 서랍이 떠올랐다

  "색시는 자주색이 안 맞아" 여자는

  내 눈 속에 숨어 나를 흘겨보는 여자에게 말했다

 

  가끔은 열리지 않는 곳에서

  여러 일들이 튀어나오곤 한다

     -전문(p. 88-89)

 

 

    ----------

    북어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다 해서 명태라고 불리는 물고기

  명태 동태 생태 또는 북어

  냉해 어종 북어

  북쪽에 사는 물고기

  이 밤을 한 그릇 국밥처럼

  담백하다고 말하면 왠지 불안하다

 

  한반도 이남에서는 멸종된 물고기

  이름만으로 여전히 떼를 지어 다니는

  명태 혹은 북어를 생각하면

  망령 같은 이데올로기

  망명한 물고기

  오호츠크 어디쯤으로

  옛날 우국지사들이 숨어들었던

  그 일처럼

  양쪽을 버리고 망명한 어종

 

  왜 이데올로기는 멸종되지 않을까

  두꺼운 코트를 입고

  증절모를 쓰고

  어느 허름한 뒷골목 식당에 앉아

  살을 발라 먹어야 할 것 같은

      -전문(p.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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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누가 시켜서 피는 꽃』에서/ 2024. 10. 20. <파란> 펴냄

 * 이서화강원 영월 출생,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날씨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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