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티처럼 날아오를 자전거가 필요해
주만 걷기 대회
신은숙
가을엔 좀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동네 한 바퀴 돌아 공원에 도착하면
기념품도 나누어 준다고 했다
경품권을 손에 꼭 쥐고 걸었다
날이 맑았다 벚나무 가로수가 울긋불긋
보도블럭의 기하학에 눈뜨면서
두어 시간 걸어 공원에 도착했다
광장에서 기다리는 건
커다란 티비와 청소기, 밥솥이랑 자전거
쌀 수십 포대와 두루마리 휴지
경품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우르르
바닥에 앉아 시의원님 격려사도 듣고
동장님 말씀도 듣고 태권도 경연도 보고
쿵짝쿵짝 가을 땡볕이 따가웠지만
손부채로 땀을 식혀도 보았지만
사람들은 하나 둘 땅거미와 함께 사라져가고
쌀도 떨어지고 휴지도 동나고
마지막 자전거를 끌고 떠나는 이의 등만 보이고
남은 사람 별로 없는데
끝까지 경품권 손에 꼭 쥐고 명색이 시인인데
욕심 어쩔 거냐 벚나무가 눈 흘겨도
다만 벚꽃 가로수 길 지나 자전거 타고
이티처럼 지구 밖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전문(p.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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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신작시>에서
* 신은숙/ 강원 양양 출생,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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