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세계
이서린
새벽 2시, 소리 없이 깜박이는 빨간 점멸등. 24번 국도에 비상등을 켠 차가 멈추었지. 여자가 내리고 남자가 따라 내리고 마주 선 두 사람은 말이 없고, 여자가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 딱, 서는데 그대로 검은 허공에 스며드는 것 같았지. 멀리 상향등을 켠 차가 달려오고 남자는 황급히 여자를 끌고 도로 밖으로 나오고, 몹시 빠르면서 격앙된 손짓, 여전히 말은 없고 거칠어진 숨소리. 적막한 시골 국도의 밤에 그들은 오로지 손짓과 몸짓,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더군. 손과 손이 부딪치는 소리, 숨과 숨이 뒤섞이는 소리, 터질 듯 붉어지는 얼굴과 격렬한 수어手語 사이, 후두둑 서로의 등을 끌어당기는 슬픈 손길. 두 사람의 검은 실루엣 저편, 비에 젖은 순한 짐승들이 울기 시작했어. 소리도 못 내고 울음을 삼킨 채 그저 깜박이는 빨간 점멸등 아래에서
-전문(p.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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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경계』 2024-여름(61)호 <신작시>에서
* 이서린/ 경남 마산 출생,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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