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순호의 마음 이해와 정화 인식(부분들)
『청담대종사전서』 (전11권)를 중심으로
고영섭
청담은 평소에 6바라밀을 좋아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인욕바라밀을 수행의 기치로 삼아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그는 누가 뭐라하든 누가 헐뜯든 간에 인욕이었다. 누가 욕을 하건 누가 혹시 때리더라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참았다. 이 때문에 그는 '인욕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화 불사만 해도 당시 송만암宋曼菴 교정은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양분해서 점진적으로 정화해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선학원에서 제1차 수좌대회를 열고 효봉 대선사와 의논하여 '불법에는 대처승 없다'고 대처승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자고 하였다. 이 주장은 수좌대회에서 합의되어 청담은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유시)도 있었지만 전국적인 불교계 정화운동을 주도하여 오늘의 조계종을 탄생시키는38)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청담이 결정코 물러서지 않는 아비발치 즉 인욕보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 사상의 체화에서 나오는 신행의 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p. 144-145)
38) 허혜정, 「나의 은사 청담 큰 스님」, 『전서 6』, p_116.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나 정진精進만이 있을 뿐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나 공존共存하고 있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동포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시각에서 불교는 차라리 사해동포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석가세존도 성불한 다음 우루벨라촌에서 내려왔고, 의상 대사도 또한 구국의 의지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늘 우리는 그분들이 내려왔고 왜 돌아왔을까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분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모국의 나라로 그의 사랑하는 동포와 형제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보다도 우선하고 바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한국인이다. 빈곤과 질병과 무지와 불결 등 많은 사회악에 시달리는 우리 동포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불교의 역사적 사명이다. 43)/ (p. 147-148)
43) 청담 순호, 『전서 10: 잃어버린 나를 찾아』, p_174.
청담은 65세가 되는 1966년 12월에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
이 되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 근교의 도선사로 들어가 평생 숙원의 하나였던 '호국참회원' 건립에만 몰두했다. 삼각산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이란 전각을 짓고 호국사상에 입각하여 설법하고 기도하였다. 호국참회원 불사에는 박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다. (p. 150)
하지만 불교계의 사정은 그를 한 시도 쉴 수 없도록
했다. 종단의 실권을 둘러싸고 파벌싸움이 잇따라 번지는가 하면 승려들의 기강은 날로 해이해져 갔다. 이 같은 실정을 보다 못한 청담은 가끔 설법이나 강연을 통해 "한국불교는 절간만 남았고 종지宗旨는 사라진 지 오래다. 모두 대오각성하라"고 애타게 호소했지만 허공의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산승이 '부덕한 소치로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 불사가 여의부진如意不進하므로 참회심을 감당할 수 없어 마침내 대한불교조계종(비구승단)에서 탈퇴를 해명하는 바입니다."46)라고 밝히며 1969년 여름 어느 날 눈물을 머금고 조계종을 탈종하고 말았다.47)/ (p. 151)
46) ⟪한국일보⟫ 1969년 8월 17일
47) 혜성, 「청담 70년」, 『전서 10』, pp_95-96.
청담은 "설령, 성불을 한 생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다 건져 놓고 부처가 되겠다는 염원만으로 살았다.50) 이 때문에 그는 원력보살이자 인욕보살로 불렸다. 이 때문에 청담의 호국사상은 참회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근간에는 불교가 있었다. 도선사 대강당을 호국참회원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그의 이러한 의지에 의해서였다.
50) 목정배, 『전서 10: 잃어버린 나를 찾아』, p_171.
호국참회불교란 신라불교의 통일염원, 고려불교의 후국염원, 조선불교의 구국염원, 현대불교의 평화염원에 입각하여 미신에 근접한 불교가 아닌 실천불교, 관념적 요소가 아닌 생활불교로 불교 재흥을 기필코 꾀하자는 청담 큰스님의 서원으로, 민족동질성을 회복해야 할 우리 민족에게는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할 사상이었다.51)
청담은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전통 불교정신이 사찰에서 말살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특히 진리를 따라 수행하게 깨달아야 하는 도량의 면모가 사라진 점을 한탄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이 바라는 대로 기도도량이 대처승의 생활터전이자 생활도구로 전락한 현실만은 후학들을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호국참회원은 전적으로 이러한 청담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청담의 호국 사상과 참회 사상은 그의 마음 인식과 공 사상의 신행과 함께 청담사상을 떠받치는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p. 153-154)
51) 차동광, 「청담 큰 스님 평전 출간에 부쳐」, 『전서 6』, p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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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사학 철학』에서/ 2024-여름(77)호 <사학_청담 순호의 마음 인식과 정화 인식> 에서
* 고영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불교철학, 인도철학)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인도불교, 한국불교) 석/박사과정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한국철학) 박사과정 수료, 논저『한국의 불교사상』『붓다와 원효의 철학』『한국불교사』『한국불교사연구』『한국불교사탐구』『한국불교사궁구』(1~2), 『한국불학사』(1~4),『한국의 불교사상』『삼국유사 인문학 유행』『원효, 한국사상의 새벽』『원효탐색』『한국의 사상가 10인 원효』(편저), 『분황 원효의 생애와 사상』『분황 원효』『불학과 불교학』『한국사상사』등 다수, 현)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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