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아몬드
최형심
아몬드 나무 아래 아무도 없는데 아몬드꽃 사이로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놓아주네. 수도원과 오래된 무덤 사이를 연분홍 우산을 쓰고 걸어도 좋은 시절,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았네. 본 적 없는 아몬드꽃을 닮은 케이크를 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이와 내가 모르는 유월의 오후를 지나 점점 단단해질 사람을 생각하네. 아몬드 나무 아래 아직 아몬드 없어, 지난밤 푸른 손톱에 내린 별들을 헤아리며 영원한 타인들의 연대기를 꿈꾸네. 그리움보다 긴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별 뜨는 은하로 흘러들고 싶은 내 곁에서 아몬드 나무의 눈부신 침묵이 피고 있는데······
(나무로 만든 마음과 고요는 서로에게 잘 어울리네.)
저물녘 어느 해변에서 나비목의 사람들과 멀로 추운 곳에서 온 꽃 소식을 열어볼 사람을 생각하네. 그곳에 연한 분홍빛 복선이 깔리면 다가울 한여름의 범람하는 꽃들 사이로 무심히 자라날 긴 긴 밤과 별들의 투명한 운행을 점쳐보네. 그리하여 행려의 날들 사이, 겹눈이 없는 어린 것들이 밤의 은빛 동선을 따라 내 멍든 무릎에 앉았다 가리. 가지 끝에서 볼륨을 높이는 심장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아몬드······ 아직 여름은 멀어 아무렇게나 아몬드꽃 피네. 라임, 로즈메리, 그리고 으스러진 아몬드······ 아무도 없는 아몬드 나무 아래 아무도 슬프지 않은 아몬드 영토를 꿈꾸네.
-전문(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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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매거진 시마 SIMA』 2023-가을(17)호 <SIMA 초대시>에서
* 최형심/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나비는 날개로 잡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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