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고장난 파라솔/ 김지헌

검지 정숙자 2024. 5. 30. 02:38

 

    고장난 파라솔

 

     김지헌

 

 

  테라스 한쪽 고장 난 채 서 있는 파라솔

  고개가 삐딱 어느새 뼈와 살이 따로 논다

 

  빗방울도 햇살도 놓쳐버리곤

  하는 일 없이 멍때리고 있는 게 꼭 나 같아

 

  건축업자가 집을 완성하고 입주한 그 순간부터

  집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영원이라고 믿었던 것들 조금씩 무너져 가듯

 

  그와 내가

  이것도 사랑이라며 동상이몽에 빠져 있을 때

  때로는 햇살로 때로는 바람이나 빗방울로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착각이었는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시작하면

  사랑 한 스푼에 눈물 여섯 스푼쯤의

  뜨거운 수프가 되고 만다고 했던가

 

  한바탕 울고 나선 누가 볼세라 얼른 털고 일어나

  다시 반짝반짝 새것처럼 닦아 내놓았었다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고장 난 파라솔을 제법 쓸 만하게 고쳐놓은 사람

  누구였을까

     -전문(p. 102-103)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시 1부> 에서

 * 김지헌/ 199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배롱나무 사원』『심장을 가졌다』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늪/ 김혜천  (2) 2024.05.30
사하라의 그림자/ 김추인  (0) 2024.05.30
물음표 관찰자 시점/ 김은옥  (0) 2024.05.30
반달에 달은 없고 반지가 웃다/ 김송포  (2) 2024.05.30
남기는 말씀/ 김금용  (0) 202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