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기다림의 미학
박덕은
죽녹원에 들어서자 흔들리는 댓잎 위에서 햇살이 리듬을 탄다. 대숲 바람 소리가 만져진다. 채워진 듯 비워진 듯 맑고 깊다. 황 기사의 미소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는 듯.
30여 년 전, 백여 평 남짓한 목욕탕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황 기사는 그곳에서 남탕과 보일러실을 관리했다.
그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을 잠시 휴학하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대나무의 곧은 줄기 같은 갈비뼈를 드러내며 목욕탕 바닥을 청소했다. 여문 소리의 단소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때 절은 시간을 밀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서면 그는 소란스런 몸짓으로 바빴다. 손님이 원하면 때를 밀어주기도 했는데 아이들과 장난치며 놀기를 더 좋아했다. 등에 아이들을 태우고 푸른 지느러미 같은 팔다리를 흔들며 파도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고래를 잡았다며 깔깔거렸다.
어느 날 퇴근길에 만난 그는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무거운 시멘트 포대를 물에 쏟아붓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시멘트 자루가 빗장이 풀리며 물속에서 질퍽해졌다. 모래와 함께 그도 오후의 몸에 뒤섞여 시간을 촘촘히 엮고 있었다. 노을이 찰지게 붉었다. 보일러실 안에다 벽돌로 된 자그마한 방 하나 만들고 있었다. 시멘트로 대나무의 마디 같은 벽돌과 벽돌 사이를 꼼꼼히 채우자 저녁이 안팎으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일이 없을 때 탈의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는 지하 보일러실에다 방을 만들어 자격증 시험도 대비하며 미래도 설계해 보겠다고 누런 이를 온통 다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순박해 보이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들었다.
그날 저녁은 그와 함께 김치찌개에다 막걸리를 곁들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밤이 깊어지면서 그는 추위에 얼기 시작한 겨울강 같은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렵게 살아가는 식구들. 그는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병약한 어머니와 나이 어린 여동생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아버지의 반지리를 대신하며 시린 삶을 혼자만의 어깨에 짊어지고 한 발 한 발 내디디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싶다며.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꿈들을 얘기할 때는 비상을 준비하는 새처람 눈동자가 빛났다. 겨울을 건너 봄의 절정으로 들어서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밝아 보여 그런 아픔이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 탈 없이 평범한 가정 속에서 성장한 줄 알았다. 그는 묵묵히 그만이 열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대뿌리처럼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대나무는 씨를 뿌린 후 5년이 지나도 거의 자라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루에 1m 가까이 자란다. 대나무의 1시간 길이 생장 속도는 30년 길이 생장 속도와 같다. 이것은 5년간의 뿌리 내림이라는 기다림이 있어 가능하다. 그 뿌리 내림처럼 그도 기다림을 비축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기다림의 시간을 짓는 것이리라. 기다림을 통해서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대나무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모래성처럼 맥없이 쓰러졌을 것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굉음을 견디며 새벽까지 기다려 본 자만이 여명을 만날 수 있다.
기다림은 자신과의 대화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기다림을 축적할 수 있다. 대나무 뿌리처럼 그도 어둠 속에서 아직은 보이지 않는 일출 같은 날을 만나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귀찮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음이 괴로울 때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놀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역경 한가운데에서 대나무가 모든 걸 비우는 것처럼 그도 비워내고 있었다.
대나무의 뿌리는 그물처럼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란다. 그러면서도 대뿌리의 속은 비움이라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듯 비어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 앞에서 두려움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삐걱거리는 균형에 포기하듯 무작정 손 놓지 않고 욕심을 비우고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비우며 기다렸기에 대나무는 강하다. 그래서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대나무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대나무. 비우며 기다린 그 대나무의 시간처럼 그도 기다림을 짓고 있었다. 빈틈없이 시멘트를 발라 내일로 가는 방을 차근차근 만들고 있었다.
성인봉 둘레길을 달려 죽녹원 정상까지 뛴다. 대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푸르게 웃고 있는 황 기사가 보인다. 어깨에 멘 죽竹 화살 같은 배낭이 달싹거린다. 기다림과 비움 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짓고 있냐 묻고 있는 듯 예리한 화살 끝이 나를 향해 있다. ▩ (p. 261-265)
--------------------------
* 박덕은 제4수필집 『바닥의 힘』에서/ 2023. 7. 10. <한림> 펴냄
* 박덕은/ 1952년 전남 화순 출생,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197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시집『느낌표가 머무는 공간』 외, 수필집『창문을 읽다』외, 소설집『죽음의 키스』외, 문학이론서『현대시창작법』외, 전) 전남대학교 교수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주일_산문집『출장보고서』/ 손흥민 정신 (0) | 2023.10.13 |
---|---|
차주일_산문집『출장보고서』/ 'ㄹ'이라는 슬픔 (0) | 2023.10.13 |
박덕은_수필집『바닥의 힘』/ 아픔에 가닿아야 한다 (0) | 2023.09.17 |
불쌍하도다 나여/ 이상국 (0) | 2023.09.03 |
왕조의 황혼을 향기롭게 지켜낸 어머니와 아들/ 김선영 (0) | 2023.08.31 |